◎전쟁·가난·낭만… 질곡의 삶 영상대변/60년대 황금기 지나 70년대 가위질 수난도/스타양산… 최근 헐리우드 열풍 극복안간힘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최인규감독의 「자유만세」가 나온 것이 1946년이었다. 국토분단의 지난 50년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영화계에도 이데올로기·외세와의 갈등과 싸움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광복 50년을 앞둔 지난해 이데올로기의 맹목성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 「태백산맥」(임권택 감독)이 나와 우리 영화가 이념 면에서 한 고비 넘겼음을 확인하게 했다.
지난 50년동안 영화는 양적 변화만이 아닌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해방후 한 해 5편에 불과하던 제작편수가 70년에는 2백편을 넘어섰고 미국영화의 직배가 정착된 최근에는 겨우 60여편을 웃도는 수준으로 위축됐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낭만의 상징이던 충무로가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거상들과 맞싸워야 하는 「국제 무역전쟁의 치열한 현장」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일제 하에 위축됐던 우리 영화는 45년 「조선영화 건설본부」가 발족하면서 활기찬 움직임을 보였다. 6·25로 영화인들이 납북되고 필름과 영화기자재가 소실돼 한동안 한국영화가 뒷걸음질을 치는 듯했으나 오히려 현실 밖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서민들의 정서와 맞아 떨어져 황금기를 맞게 된다. 특히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유현목 김기영 이만희 신상옥등은 탁월한 작품들로 우리 관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전후 어느 일가의 황폐한 삶을 그린 「오발탄」(61년·유현목), 인간을 본능과 에고이즘이라는 틀로 해부한 「하녀」(60년·김기영), 한국적인 서정을 영상화한 「사랑방손님과 어머니」(61년·신상옥),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63년·이만희) 등은 당시 영화계가 얼마나 많은 인재들과 풍성한 수확으로 가득했나를 말해 주는 작품들이다.
60년대의 영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고김승호이다. 그는 61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인 「마부」를 비롯, 「로맨스 빠빠」(60년) 「로맨스 그레이」(63년)등 일련의 영화에서 한국적 아버지상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
그와 함께 김진규 신영균 최무룡 장동휘 최은희 김지미등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관객과 애환을 같이 했다. 신성일·엄앵란커플은 청춘남녀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들이 주연한 「맨발의 청춘」(64년·김기덕 감독)은 그후 60년대 청춘영화의 전형이 되었다. 또 김수용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65년)는 고아들의 홀로서기를 그려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젖게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은막의 주역은 신성일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등 트로이카로 교체됐다.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3공화국의 경제드라이브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스크린에도 청춘영화가 범람했다.
정소영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68년)은 처첩제가 여전하던 사회상과 맞물려 소위 고무신관객(가정주부)을 극장에 불러 모으면서 71년까지 무려 4편이 연이어 제작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만희감독이 「7인의 여포로」(65년)에서 중공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은 60년대 영화가 남긴 아픔이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TV가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3공 정권이 강력한 영화법을 통해 영화계를 장악하면서 영화는 질적으로 크게 후퇴했고 영화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의식을 남겼다.
영화사의 설립기준과 사전 검열을 대폭 강화해 영화인들의 의욕을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 방화제작 편수에 따라 외화수입권을 주는 소위 수입쿼터제를 도입, 부실한 국산영화의 양산을 부채질했다.
그 속에서도 70년대의 영화계는 김호선 이장호 하길종이라는 걸출한 감독들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호선의 「겨울여자」(77년)는 젊은 여성들의 성의식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고 「영자의 전성시대」(75년)는 소위 호스티스영화의 원조가 됐다.
이장호는 「별들의 고향」(74년) 「바람불어 좋은 날」(80년)등을 연이어 발표, 허무와 반항으로 요약되는 당대의 청년문화를 영상으로 선도했다. 갓 유학에서 돌아온 하길종은 「화분」(72년) 「바보들의 행진」(75년)등으로 지성인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냈다. 당시의 스크린은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의 신트로이카로 채워졌다.
80년대는 임권택감독의 「만다라」로 막을 열었다. 그는 이후 「길소뜸」(85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89년)등을 국제영화제에 출품해 한국영화 세계화의 길을 열었고 93년 한의 정서를 영상화한 「서편제」로 한국영화로서는 전무후무한 관객 1백만명(서울 기준) 동원의 위업을 이룩했다.
배창호의 출현은 하나의 돌풍이었다. 국내 최초로 미국 올로케이션을 시도한 「깊고 푸른 밤」(84년)은 세련된 영상으로 신세대 영화의 틀을 제시했다.
84년 새 영화법에 따라 제작이 자율화하고 영화가 제2의 도약기를 맞는가 했으나 87년 한미무역협정에 따라 시작된 미 직배사의 출현은 한국영화에 결정적인 위기를 불러왔다.
직배영화를 앞장서 받아들인 극장에 불을 지르고 뱀을 넣은 유동훈(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이일목(시나리오 작가)씨등이 구속된 사건은 우리 영화사의 비극이자 우리 영화가 할리우드시장체제로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93년 외화수입은 4백20편, 4백64억4천7백만원인데 비해 우리영화의 수출은 14편, 1억1천9백20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은 우리 영화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할리우드영화의 공세 속에 우리 영화가 「투캅스」(93년)의 강우석, 「결혼이야기」(92년)의 김의석, 「김의 전쟁」(92년)의 김영빈, 「장미빛 인생」(94년)의 김홍준등 30대 감독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몫을 찾아가고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김경희 기자>김경희>
◎「세계화」이끈 감독들/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마부」강대진 감독 시발/배용균 감독 89년 로카르노서 최우수작품상
우리 영화가 처음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것은 1956년이었으나, 최초의 수상작은 61년 강대진감독의 「마부」였다. 이 영화는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아역배우 전영선이 「이생명 다하도록」(신상옥 감독)으로 제12회 베를린영화제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우리 영화가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한 것은 87년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배우 강수연이 임권택감독의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 처음이다. 이후 우리 영화의 해외진출이 본격화했다.
신혜수가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로 제12회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강수연이 임권택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임 감독은 93년 제1회 상해영화제에서 「서편제」로 감독상과 함께 오정해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줌으로써 「여배우 상 타주는 감독」이라는 명성을 확인했다.
우리 영화가 거둔 값진 수확중의 하나는 89년 배용균 감독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89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것이다. 92년에는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이 제5회 도쿄영화제에서, 93년에는 백일성감독의 「한 줌의 시간속으로」가 제46회 살레르노영화제에서 각각 작품상을 수상,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였다.<장인철 기자>장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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