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재무위소속 민자당의원들은 요즘 말이 없다. 정부가 최근 「당정합의」라는 꼬리표를 붙여 내놓은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큰 파문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는 이번 개정안이 협상용이 아닌 최종안임을 강조하며 『처리는 국회의 몫』이라며 뒷짐을 지며 총대를 국회로 떠넘겼다. 하지만 정작 민자당의원들의 곤혹감은 대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야당과 한은, 경실련등 시민단체의 반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 것같다. 문제는 오히려 이번 개정안의 내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들러리」만 섰다는 무력감이다. 또 한은등이 「개악」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의 몇몇 주요내용에 은연중 공감하는 것도 이들의 운신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의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당정합의」로 포장키 위한 재무당정회의가 긴급소집된 것은 「안기부 문건사건」이 불거진 20일 낮, 정부안의 공식발표가 있기 불과 2∼3시간 전이었다. 당시 적잖은 의원들은 이 자리에 정부가 가져온 안이 『88년께 한번 만들어봤다가 창고속에 넣어 두었던 안』이라는 느낌을 받고 부분적으로 이의도 제기했지만 『이미 청와대에 보고한 안』이라는 얘기에 대부분 입을 닫았다는 후문이다.
이와 관련, 비교적 한은독립에 긍정적이었던 한 의원은 『은행등의 감독기능을 한은에서 떼어낸 것은 그렇다 쳐도 금통위의장이 한은총재를 맡도록 한 것등은 예상밖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이 정부안에 동의했느냐』는 물음엔 『글쎄, 어려운게 있더라구요…』라며 묘한 뉘앙스를 남겼다.
이런 정황을 뜯어 보면 민자당의원들은 미처 내용을 숙지하지도 못한채 회의에 참석했다가 뭔가 서두르는 듯한 정부의 보폭에 장단만 맞춰준 흔적이 짙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 국회에서 한은법개정안을 꼭 처리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돌아서자 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책정당화를 당개혁의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여전히 핵심정책의 산실도 모른채 정부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자신들의 신세가 한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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