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신묘년기사」와 글자달라/일 주장 뒤엎을 계기될듯/국내학계 1차검증 결과 확인 중국에서 반입된 광개토왕릉비(서기 414년 건립) 비문 초척본(초탁본)은 현재까지 확인된 최고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한반도지배설에 근거가 돼온 일본학자들의 해독과 다른 부분이 드러나 진위여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18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초탁본을 기증받은 독립기념관(관장 최창규)은 23일 일본이 백제 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해온 신묘년 기사 부분에 일본의 주장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일본이 초탁본이라고 주장하는 1889년본과 글자 6개가 다르다고 밝혔다.<관련기사 4·5면>관련기사 4·5면>
비문의 해독에 초점이 돼온 신묘년기사의 「백잔 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도해 파백잔□□□나 이위신민」이라는 32자 중 「나」의 앞 글자를 일본은 신자의 오른쪽 부분인 「근」으로 해석,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해왔으나 이번 초탁본에는 「근」자 부분이 빈 칸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전체 4개면 가운데 1개면에서만 목(아의 잘못) 토(상의 잘못) 불완전한 문자(흡으로 판명) 비(산의 잘못) 용(우의 잘못) 겸(군의 잘못) 등 일본탁본과 6자가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초탁본을 검토한 학자들은 「적어도 비문이 조작(1883∼1888년)되기 이전의 정본으로 보인다」는 1차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앞으로 2∼4면에 대한 본격 연구가 끝나면 동북아고대사 정립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탁본이 서첩형태로 돼 있는 점, 1880년대에 완전한 탁본을 제작하기 어렵다는 점등을 들어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초탁본은 1880년대에 제작돼 청황실에 진상된 뒤 주인이 바뀌어 개인이 소장해오던 것을 기아그룹(회장 김선홍)이 지난해 입수,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며 타블로이드판 크기에 한 장 6자씩 실물 크기로 탁본, 4권으로 묶은 서첩이다. 중국정부는 문물연구소 소속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증작업을 벌였으며, 베이징(북경)시 문물감정센터는 최고의 초탁본임을 입증하는 감정서(감정번호 00176호 「초척신자 완호본」)를 발행했다. 본래 제목이 「고려국영락호대왕비초척본(고려국영락호대왕비초탁본)」인 초탁본은 중국정부가 해외에 처음 공식반출한 문화재로 함께 제작된 또 한 벌의 초탁본이 자금성에 소장돼 있다. 우리나라가 1천8백여자의 비문탁본 전체를 입수하기는 처음이다.<서사봉 기자>서사봉>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