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논쟁 향후 초점/훼손글자 제대로 드러나/판독통해 조작여부 검증 한·중·일 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판독은 이번 초탁본 확보를 계기로 새 전기를 맞게 됐다. 한일학자들에 의해 첨예하게 대립됐던 「신묘년기사」중 판독이 어려웠거나 그동안 조작의 의혹이 짙었던 글자들이 밝혀져 비문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종식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883년부터 연구를 시작한 일본육군참모본부 소속학자들은 비문중 광개토대왕 5년(서기 396년)의 치적을 새긴 「신묘년기사」32자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신묘년기사」는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도해 파백잔□□□나 이위신민」이다. 그들은 그 부분을「백제 신라는 옛날부터(우리=고구려)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등을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 「임나일본부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1930년대 후반에 쓴 논문에서 「고구려가 왜의 본거지를 격파해 백제 신라와 함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 일본의 주장을 반격했다. 그 뒤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씨가 일본참모부의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전기를 맞게 됐다. 그는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라는 저서에서 『일본정부가 1900년을 전후해 3차례나 사람을 보내 석회로 비문을 지우고 필요한 원자의 자형을 만든 후 탁본을 떴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비문변조론이 발표되자 일본학자 대부분은 그 해석을 무시한 반면 민영규 정두희 이형구 등 국내학자들은 위당의 비문해석을 토대로 비문변조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폈다. 특히 이형구정신문화연구원교수는 81년 『신묘년기사중 「왜」자가 비문에 새겨진 다른 「왜」자와 모양이 달라 「후」자를 변조한 것이 확실하다. 이같은 변조사실은 경자년 기사에서도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차례 비를 조사한 중국학자 왕건군은 1984년에 출간한 「호태왕비 연구」에서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 일부를 다듬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를 개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탁본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방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임기중 동국대교수는 94년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기도 전인 187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탁본을 베이징(북경)의 한 소장가로부터 입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연구의 1급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자료가 나타난 만큼 3국학자들이 고대사연구의 수수께끼를 풀 객관적 자료로 인정하고 검증하는 것이 첫번째 과제이다.
또 변조의 의혹이 지적됐던 신묘년기사중 밝혀지지 않았던 글자에 대해 원문자 확인작업을 함으로써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해 만들어진 탁본에 있던 「근라」부분에서 「근」이 이 초탁본에는 빈칸으로 남아 있어 충분한 연구검토를 거쳐 일제의 조작여부를 밝혀야 할 것이다.<최진환 기자>최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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