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참모본부본」 내세워/연구독점·왜곡 일삼아와 국내 역사학계는 광개토왕릉비문 초척본(초탁본)의 인수로 1천5백여년동안 외국에 방치된 고구려 역사와 고대 동북아지역의 국제관계를 우리 손으로 직접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특히 고구려의 건국, 광개토대왕의 대외정복업적등을 기록한 광개토왕릉비문 내용중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동북아 고대사에 대한 한·중·일 학계의 최대쟁점이 돼 왔다는 점에서 이번 초탁본의 인수 의미는 더욱 크다.
일본이 1889년 육군참모본부의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연구결과를 묶어 왜곡 발표하면서 이 부분의 연구를 독점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학계는 소위 신묘년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의 주요한 근거로 삼았으며 일본을 고대동북아의 맹주국으로 부각시켰다.
이번 초탁본에서 특히 주목할 사실은 관련학계의 1차 검토결과 일본의 탁본조작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4면 가운데 1면 탁본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섯글자는 문맥상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이 최고의 것으로 간주하는 탁본 가운데 「위목」(나무로 배를 잇고 거북이를 띄워…로 해석)은 「위아」(「나를 위해 배를 잇고 거북이를 띄워서…」)의, 은택□(은택·□은 해독이 안 된 글자·해석이 안됨)은 「은택흡우황천」(은택이 온 하늘에 가득찼다…)의,「부비지염수」(비석을 짊어지고 염수에…)는 「부산지염수」(산을 뒤로 하고 염수에…), 「당용마겸양」(말과 함께 양을 썼다)은 「당우마군양」(소 말 양의 무리가 수를 헤아릴 수 없다)의 잘못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새로 판독됐거나 기존 글자와 다르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발간한 「회여록」 권5의 내용과 비교한 것이다. 일본은 당시 제시한 탁본을 공개하면서 탁본연대가 1889년으로 최초의 탁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889년판 일본탁본은 사료로서 결정적 결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초탁본을 통해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초탁본의 국내반입은 한 기업이 끈질긴 노력을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중국정부가 92년 우리나라와 수교를 한뒤 처음 본격적으로 문화재반출을 허용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한중 학술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 의미를 갖는다.
독립기념관은 3월중 중국측 감정자인 쉬징신(서경신)씨와 재일사학자 이진희씨 등을 초청, 세미나를 개최하고 8월에 한·중·일 3국 관련학자가 이 탁본을 본격 연구하는 국제 세미나를 열어 최종 연구결과를 광복50주년 직전에 발표할 계획이다. 이번 연구에는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비면이나 탁본에 대한 적외선촬영등 최신 과학기술도 활용할 예정이다.<서사봉 기자>서사봉>
◎국사학계 반응/“일측주장 반박할 귀중한 자료/미진한 고구령연구도 활성화 기대”
독립기념관측이 기증받은 광개토왕릉비문 초탁본에 대해 국사학계는 대체로 고대 동북아 지역의 국제관계, 특히 한·일관계사의 진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현강(연세대 사학과) 교수=광개토왕릉비 탁본에 대한 논란이 계속돼왔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럽지만 일단 이번에 반입된 탁본으로 한일 관계 고대사의 진실이 명쾌히 밝혀지길 기대한다. 그동안 탁본 중에 문제가 됐던 것이 바로 한일 고대사 관련 부분이었는데 일제 군부가 일본측에 불리한 내용의 글자 몇 개를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주장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탁본임이 확인된다면 한일 고대사의 쟁점과 논쟁을 잠재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고대사 전반에 걸쳐서도 학계의 이정표가 될 만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자존심이 상할 것이고 도덕적으로, 학문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며 이후 일본역사학계의 방향은 그들의 양심에 달려 있다.
▲신형식(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이번에 반입된 탁본으로 오랫동안 계속돼 온 한일 고대사의 퀴즈풀이가 마감되길 바란다. 탁본 내용이 정밀하게 판별될 경우 학계의 역사 연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민족 자존심을 고양시키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한반도 일부를 일본측이 경영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무너뜨리고 고구려의 힘과 세력을 새롭게 결정짓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백(한림대 사학과) 교수=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전에 뭐라 할 수는 없으나 광개토왕릉비가 고구려 역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이번 탁본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동안 일본이 바다를 건너 왔다는 주장을 뒤집기 위해서 여러 각도로 일본 탁본을 검토해왔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는 못한 것 같다. 새로 발견됐다는 글자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기다린다. 또 광개토왕릉비는 바로 그 이상의 사료가 있을 수 없는 고구려사의 근본이라는 점을 되새겨 굳이 일본 관련 부분에만 매달리지 말고 고구려 자체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영수(단국대 사학과) 교수=반입된 광개토왕릉 비문 탁본이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거나 초탁본으로 판정되려면 우리들 같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가 필요하다. 판본을 감정해 본 결과 일제의 탁본보다 빠른 시기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탁본중에 새로 확인된 글자와 일본 탁본과 다르게 나타난 글자가 있지만 여러 탁본들을 보면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김병찬 기자>김병찬 기자>
◎중 초탁본 한국오기까지/보안속 1년여 소장가 설득/중 출장 기아간부… 현지학자에 “초탁본” 확인
광개토왕릉비문 초탁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는 1년여간의 지루한 기다림과 끈질긴 협상을 거쳐야 했다. 이 초탁본은 한중수교 이후 처음으로 중국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반입된 귀중한 문화유물이라는 점에서 「첩보전」 못지 않은 치밀한 보안과 준비과정이 있었다.
지난해 11월 초탁본의 국내반입에 성공한 기아그룹(회장 김선홍)이 입수작업을 시작한 것은 1년여전. 이 회사의 한 고위간부가 자동차공장 설립문제로 중국 출장중 한 만주족의 후예가 일본측이 조작하기 이전의 광개토왕릉비문 초탁본(1질 4권 서첩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아그룹측은 즉시 탁본소장자에게 접근, 입수의사를 밝혔으나 완강하게 거부해 소장자의 마음을 돌리기까지 6개월이 소요됐다. 이 과정에는 기아그룹과 사업관계를 맺고 있는 한중경제교역(주) 사장 김정두씨의 중재가 큰 도움이 됐다.
끈질긴 설득끝에 소장자로부터 탁본을 건네받은 기아그룹은 국내 반입에 앞서 중국내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우리의 문화체육부인 중국 문물부의 학자들은 이 초탁본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최고인 1880년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뜻인 「초척 신 완자 호본」(신묘년기사가 완전하게 보이는 초탁본)이라는 감정결과를 통보했다. 또 문물부 연구책임자 쉬징신(서경신)씨 등 중국 학자들은 일본측이 소장한 탁본과 11자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초탁본은 1880년께 지린(길림)성 지안현 초대 현장이 부하를 시켜 탁본을 뜬 것이다. 이때 함께 제작된 또 다른 탁본 1질은 현재 중국 자금성 금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반입된 초탁본은 청나라 황실이 보관해오다가 개인에게 넘어가 지금까지 6차례 주인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50주년, 회사창립 50주년을 맞아 의미있는 문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기아그룹은 이번에 반입한 초탁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김철훈 기자>김철훈>
◎광개토대왕과 비/중 집안현위치… 장수왕때 제작/최대영토확장 선왕업적 등 새겨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414년(장수왕 3년)에 세워졌다.
위치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 대비가. 비석은 자갈돌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는 응회암인데 자연석 그대로의 장방형 기둥모양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 비석중 가장 크다.
높이가 6.39, 윗면과 아래면이 약간 넓고 허리부분이 약간 좁은 모양이다. 아래부분의 너비로 따지면 제1면(동남방향)이 1.48, 제2면(서남방향)이 1.35, 제3면(서북방향)이 2.00, 제4면(동북방향)이 1.46이다. 능비 서남쪽 약 2백 지점에 태왕릉이 있고, 동북쪽 약 1.3에는 장군총이 있다.
글자는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으로 모두 44줄의 세로행에 1천8백여자(추정)가 새겨져 있다. 예서를 기본으로 초·해체를 부분 부분 반영했고 자형은 정방형이다.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5∼413)은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이다. 즉위 초부터 백제를 공략,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장악했으며,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왜구를 격퇴했다. 서로는 연에 반격하여 7백여리의 땅을 탈취했고(400년) 동부여를 정벌(410년), 철령 이북을 지배하는 등 대륙만주를 장악하려던 고구려의 꿈을 처음 현실화했다.<김범수 기자>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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