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세계탁구대회 공동응원 계기/광복 50주년 기념행사도 함께 추진 「대립과 반목의 시대」에서 「화해와 통일의 시대」로.
최근 재일동포사회에서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 약칭)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약칭)간의 원만한 관계 재정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특히 이같은 기대는 90년대 이후 두 단체가 각종 문화 체육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해 어느정도 화해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바탕에 깔고 지난해 김일성 사후 조총련 조직의 동요가 두드러지면서 폭넓게 확산돼 가고 있다.
재일동포사회의 역사는 민단과 조총련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돼 왔다. 일본땅에서 광복을 맞은 재일동포들은 45년 10월15일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했으나 북한의 지령을 따르는 좌익계가 사실상 운영을 주도하자 남한을 지지하는 20여개 단체가 조련을 탈퇴, 46년 10월3일 「재일본 조선 거류민단(재일본 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면서 동포사회가 양분됐다.
두 단체는 분리후 찬탁·반탁을 놓고 혈투를 벌였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 테러등 유혈사태는 더욱 심해졌으며 그후에도 한일국교정상화등 남북한간에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대리전」양상의 치열한 싸움을 거듭해 왔다.
이 과정에서 조련은 조총련으로, 재일본 조선거류민단은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을 거쳐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나 이념투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두 단체가 분리된 초창기에는 조련의 재산을 차지한 조총련이 경제적으로 풍족해 다소 우세했으나 70년대 이후 민단계로 전향하는 동포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사실상 민단이 동포사회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총련은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연간 수십억달러를 북한으로 보내 「북한의 달러박스」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조총련은 내부 세력다툼으로 여러 차례 진통을 겪었고 40여년째 계속되고 있는 한덕수 의장 체제의 노화와 주체사상 교육에 대한 2·3세들의 회의등 심한 갈등으로 조직유지에 급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대학동창회 논문집에 공산주의 혁명을 부정하는 글이 실렸고 조직강령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또한 김정일 세습체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다는 것이다.
18년간 조총련에서 활동하다가 68년 탈퇴한 일본 화원대 강재언(69)교수는 『최근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갈등등 이념적인 문제로 조총련에 염증을 느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탈퇴자가 늘어 조직이 크게 동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동서냉전체제 붕괴와 함께 민단과 조총련 사이의 관계도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91년 남북단일팀이 참가한 지바(천엽)세계탁구선수권대회때 공동응원을 한 것이 관계재정립의 이정표가 됐으며 이후 지난해 교토(경도) 정도 1200주년 행사와 바둑대회등 각종 체육 문화행사를 통한 화해분위기가 점차 형성돼 가고 있다.
민간차원에서도 「원 코리아 페스티벌」이 84년 오사카에서 시작돼 지난해로 10회째를 마쳤으며 지방단위에서는 화해의 저변이 상당히 확대된 상태다. 나아가 민단과 조총련은 오는 8월15일 광복50주년 기념행사의 공동개최도 추진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최근 민단에도, 조총련에도 가입하지 않은 동포들이 「재일 한국 조선인 문제 학습센터」등 이념을 떠난 순수한 목적의 각종 단체를 잇달아 결성, 동포사회의 「제3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어 이들의 활동도 주목되고 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동포사회의 일체감과 단합을 위해 두 단체의 화해와 조국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도쿄·오사카=박상준 기자>도쿄·오사카=박상준>
◎귀화인단체 「성화회」/60년 결성 회원 1만7천명… “피와 마음은 한국사람”
『비록 귀화는 했지만 뿌리는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재일동포들 가운데 어쩔수 없이 일본에 귀화하는 동포들이 매년 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이 결성한 임의단체 성화회(회장 야마시타 노부시로·산하수홍·69)의 활동도 활발하다. 성화회는 35년전인 지난 60년 시모노세키(하관)에서 처음 결성됐다.
귀화는 했지만 「완전한 일본인」이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민단이나 조총련과의 관계도 어려운 귀화인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자녀결혼이나 취직 같은 어려운 일들을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을 만들었다.
이후 이 단체 결성은 오사카(대판), 도쿄(동경), 나고야(명고옥), 홋카이도(북해도) 등지로 확산됐고 71년에는 전국연합회가 결성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됐다. 현재 회원이 1만7천여명으로 오사카의 본부와 전국에 7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이들의 귀화동기는 대부분 사업문제나 자녀들의 결혼문제. 7세때 아버지를 따라 도일한 야마시타(한국명 박춘생)회장도 전후 민단 오사카지부 감찰위원장을 지내는등 민단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그러던 야마시타씨는 지난 78년 자신이 경영하던 채석업체가 일본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려 했으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귀화를 결심했다.
그러나 귀화를 하더라도 호적에는 「한국에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귀화후 3대가 지나기 전까지는 한국인임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일본사회에서 각종 차별대우를 받기는 한국국적 동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더구나 대부분 민단출신인 성화회 회원들은 『조국을 저버렸다』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한때 민단 동포들과도 불편한 관계로 지내야 했다.
귀화인들도 조국의 번영을 기대하며 모국의 각종 사업에 성금을 지원해 온 것은 물론 장학사업·불우이웃돕기등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성화회는 이제 순수한 친목단체 수준을 넘어 보다 활발한 대외활동을 위해 4월에는 일본정부에 사단법인 등록을 준비중이며 법인등록이 끝나면 별도 회관을 건립해 귀화동포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 계획이다.
야마시타건설 등 3개 업체 대표와 신용조합 오사카상은 이사 등 7개의 굵직한 직함을 갖고 있는 야마시타회장은 『이제 본국도 경제가 발전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는등 모든 분야가 순조롭게 풀려가 기쁘기 그지없다』면서 『비록 귀화를 했지만 피와 마음은 한국인』이라고 강한 민족의식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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