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민족혼에 대한 향수 세계 최후의 분단국, 한반도를 향해 밀려드는 파고가 높다. 그럼에도 세계화라는 담론의 홍수 속에 20세기의 간난한 한국사를 가로질러온 민족주의적 동력은 마치 헌신짝 취급을 받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보수든 진보든 서둘러 개화파의 옷으로 갈아 입고 세계화의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물론 저 답답한 척사위정파를 기리자는 것은 아니다. 열강의 이해가 착종하는 동아시아의 결절점에 자리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20세기의 고단한 한국민족주의의 도정을 공과 양면에서 따져보는 성숙한 자세가 지금 절실히 요구되는데, 이 바탕에서만 세기말의 격동 속에서 그 진정한 쇄신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인 박 현의 「달은 결코 도자기처럼 부서지지 않는다」(창작과비평, 95년 봄호)는 바로 이 문제를 드물게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작품은 우리 검법을 수련하는 작중화자 「나」가 어느 날 밤에 방랑검객이 되어 청이 명을 멸망시킨 1644년의 원동으로 떠나는 일종의 시간여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짜 넣은 액자소설이다. 그런데 겉이야기와 속이야기가 분절되는 일반적인 액자와 달리 작중 화자가 속이야기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브레히트식의 소격효과를 겨누고 있으니, 독자들은 어떤 점에서 더욱 편안하게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듯 작품에 동참하게 된다. 무협지같은 소재를 무협지 재미도 주면서 결코 무협지로 떨어뜨리지 않는 작가의 솜씨가 신인답지 않게 만만치 않다. 더구나 이 새로운 형식 실험 속에 갈무리한 메시지 또한 침중하다. 「나」가 시간여행 속에서 만난, 아니 만들어낸 여검객, 병자호란때 만주로 끌려와 효종의 북벌때 안에서 접응하기 위해 왜구에게 포로된 조선동포들을 단신으로 구출하러 왜구들과 싸우러 떠나는 이 조선여인이 정신대로 자살한 「나」의 조모와 몽타주되면서, 작품은 아연 무협지의 탈을 벗어버린다. 「그러나 방랑자는 독한 술이 깨고 나면 마침내 검을 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아름다운 여검객을 찾아나서게 될 것이다. 그녀는 결코 도자기처럼 부서지지 않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더러 드러난 국수적 징후는 작가가 엄중히 경계해 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민족주의의 길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인하대교수·문학평론가>인하대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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