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총선통일」… 끝내 「총구통일」/“양립체제” 불안한 동거4년… 남긴건 “잿더미” 통일은 바로 과거청산이다. 서로 다른 지도자와 체제가 지배하던 이질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고 접목하려면 과거청산이 전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완성하자면 화합과 조화가 중요하지만 통일과 물려 있는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갈등과 반발, 그리고 저항이 불가피하다. 예멘의 경우 과거청산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그것은 불행하게도 체제간의 전쟁이었다. 즉 통일이 전쟁을 불렀다고 말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전쟁을 통해 불완전했던 통일이 완성된 것이다.
유례를 찾기 힘들었던 협상과 합의에 의한 통일방식은 결국 하나의 정치적 실험에 그쳐 버린 셈이다.
비극적인 통일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예멘에서는 통일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나 기념관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다. 스커드미사일과 대포에 의해 파괴된 건물과 녹슨 채 방치돼 있는 탱크의 흉물스러운 잔해만이 비극적인 과거청산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90년5월 남북예멘이 통합을 선언한 이후 양측의 정치지도자들은 과거청산을 위한 노력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모범적인 청산방식을 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들은 모든 권력과 직위를 균등하게 반분했다. 살레 북예멘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알 아베이드 남예멘서기장이 부통령직을 맡고 이들을 포함한 5인으로 구성된 대통령위원회(북예멘3인, 남예멘2인)가 30개월의 과도기간을 통치키로 합의했다. 남북이 모두 이슬람국가여서 사회문화적 통합은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았다. 남예멘은 사회주의, 통제경제체제를 버리고 북예멘의 민주주의 시장경제에 통합됐다.
그러나 청산노력은 결국 하드웨어뿐이었다. 양측은 통일후 총선을 통해 자신들의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양측은 균등한 권력을 통해 협력과 화해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 상호견제와 상대방의 약화에 힘을 쏟았다.
당초 합의와 달리 군대를 통합하지 않고 각각 독자적으로 유지한 것도 힘의 기반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치인에 대한 암살이 끊이지 않았고 갈등이 생길 때마다 알 아베이드부통령은 남예멘에 내려가 버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과거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관리 수를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해 공무원 수가 46만명에 이르렀고 예산의 60%이상이 인건비로 지출될 정도였다. 관료체제의 비대화와 비효율적인 국가경영은 행정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부패가 만연됐다. 결국 4년후인 94년5월 군막사에서의 사소한 무력충돌이 기폭제가 돼 전면전이 시작됐지만 전쟁은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개월여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은 불완전했던 구체제의 청산을 매듭지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과거청산작업은 구북예멘에 의한 남예멘의 무력흡수통일이 이뤄진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살레대통령은 전쟁중 남측가담자에 대한 사면복권을 단행, 약1만여명을 사면하고 국민화합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예멘의 망명핵심세력 16명에 대해서는 전범재판에 회부한다는 입장이다.
통일예멘이 당면한 구체제의 청산은 구남예멘 사회주의 체제하의 국유재산 반환문제, 이슬람전통이 비교적 회석됐던 남쪽 사회체제의 정통회교화등이 된다. 예멘의 통일4년은 결국 구체제의 확실한 청산을 위한 준비기간이었으며 전쟁은 그 대가였던 셈이다.<사나=한기봉 특파원>사나=한기봉>
◎두달내전 시작과 끝/지휘선 다른 군막사 내부서/사소한 충돌이 발단/사회주의 남지도부 망명
94년 5월5일 새벽5시20분. 구북예멘의 수도이자 통일예멘의 수도인 사나시내에는 전투기와 대공포의 굉음이 진동했다. 90년 5월22일 세계의 찬사를 받은 예멘의 합의통일이 무너지면서 2개월에 걸친 내전이 발발하는 순간이다.
하루 앞선 4일 하오8시. 사나시내에서 남방으로 1백떨어진 다마르 군막사에서는 4월27일에 이은 두번째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같은 병영을 사용하면서도 지휘계통이 다른 구남북군의 갈등은 고조될 대로 고조돼 있었다. 이로부터 9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남예멘 지도부는 사나시내의 공습을 결정했다.
북예멘은 곧바로 남예멘의 수도인 아덴을 공습했다. 살레대통령은 30일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즉시 남예멘출신의 가심국방상을 해임했다. 의회는 남측 지도정당인 예멘사회당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북측은 사나시내의 예멘사회당 본부건물을 장악하고 주요인사를 체포했다.
스커드미사일공격과 전선에서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5월20일 남측의 알 아베이드 통일정부 부통령은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6월4일 남측은 그들에 우호적인 사우디의 군사개입을 요청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5일 북군은 남예멘 아덴의 정유소를 공습했다. GCC(걸프만협력기구) 5개국은 즉각 정전을 호소했다. 9일 북측은 정전을 선포하고 남측도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수시간만에 전투가 재개됐다. 10일부터 유엔특사가 양측을 중재했다. 전선은 그러나 북측의 우세로 점차 돌아갔다.
7월6일 남측의 알아베이드부통령은 인근 오만으로 망명했다. 7일 북군은 아덴에 무혈입성했다.살레대통령은 반통일세력은 붕괴됐다고 발표하고 승리를 선언했다.<사나=한기봉 특파원>사나=한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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