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기 전, 작년 연말 주택가의 쓰레기더미는 정말 대단했다. 버리기도 끼워두기도 마땅찮은 세간살이나 주방용품으로부터, 마침 신년을 앞두고 주고 받은 선물의 과장된 껍데기에 이르기까지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폐기물은 차들의 진입을 막고 사람들의 통행에까지 불편을 줄 지경이었다. 그것들이 다 정리되기까지 상당기간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아파트란 얼마나 거대한 소비자인 동시에 쓰레기의 생산자라는 게 혐오스러웠고, 쓰레기야말로 미구에 닥칠 무시무시한 재앙의 예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흔하게 쓰고 버리는 사람들이 규격봉투값이나 처리비가 얼마나 된다고 그걸 아끼려고 미리 저렇게 갖다 버리나 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으나 내 집과 이웃집의 쓰레기와 불요불급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바라봐야 하는 괴로운 기간은 우리의 소비생활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꼭 필요한 동안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정에서 설까지는 한달상관이고 우리의 오랜 관습상 설에 더 많이 음식도 차리고 선물꾸러미도 들고 다니게 돼 있는데도 설에는 신정같은 쓰레기 적체현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버릴 건 다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달동안에 분리수거가 그만큼 정착된 것이다. 그건 또한 각 가정에서 그만큼 수고를 한 결과인데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보통 시간과 신경과 체력이 쓰이는 일이 아니다. 누가 넙적한 선물꾸러미만 들고 들어와도 그걸 먹게 돼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접어서 판판하게 만들기 쉬운 상자인지, 스티로폴로 채워지지나 않았는지 그 걱정부터 하게 된다. 나무상자인 경우 재활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신문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 넣은 광고지도 비닐코팅이 된 것 안된 것을 가려서 버려야 하고 우편물을 봉한 비닐 테이프도 뜯어서 따로 버려야 한다. 우유팩을 씻어서 판판하게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고 망치로 두드려서 분해를 하거나 발로 밟아 찌그러뜨려서 부피를 줄여야 하는 것들도 많다. 한 달에 아무리 많이 들어봤댔자 몇 천원이면 될 규격봉투값을 아끼려고만 그런 수고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이고, 너무 늦은 일이고, 어쩌면 이 작은 일이 지구에 닥칠지도 모를 재앙을 유예할 수 있는 큰 일이다라는 쓰레기종량제의 근본취지에 대한 동의 때문에 보람까지 느끼면서 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쓰레기도 하도 여러 번 손이 가고 난 후에 버리게 되니까 애착이 간다고나 할까, 무심히 지나쳐지지를 않는다. 종이류는 빨리 수거가 되는데 비닐류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오래 굴러다니고 특히 페트병이라고 하는 투명한 음료수 병의 적체가 심하다. 보통 재활용이 안 되는 걸로 알려진 이 병이 겨울인데도 이렇게 많이 배출되는 것은 마실 물을 사 먹기 때문이다. 마실 물까지 사 먹는다는 것은 수돗물을 못 믿기 때문이고 수돗물을 못 믿는 것은 땅이고 강이고 할 것 없이 국토가 오염됐기 때문이다. 생수라고 파는 건 과연 믿을만 한지 어디서 나는지도 의문인데 그걸 마시기 위해 땅이나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고는 처리가 불가능한 공해물질을 마냥 생산하도록 내버려둬야 하는가. 그 사업이 그렇게 번창한다면 마땅히 그 사업체가 수거와 처리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자사 제품이 많이 팔리는 슈퍼에 자기 기업에서 나온 용기를 수거하는 수거함을 따로 마련하고 용기에다가 재활용이 된다는 표시를 의무적으로 하게 하는 방법은 소비자로 하여금 그런 표시가 없는 물건을 안 사게 한다는 뛰어난 홍보효과가 될 것이다. 그런 표시는 KS마크처럼 국가에서 일정한 표시를 만들어 모든 재활용품에 공통으로 통용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활용이 비용이 더 든다는 것은 상식이니 지원과 함께 임의로 처리할 수 없도록 하는 관리에도 철저해야 할 줄 안다. 국가가 그런 일을 해야지 왜 개인만 통제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상식적으로도 수많은 개인을 통제하느니 기업단위로 생산의 구조 자체를 그런 방향으로 통제하는 게 훨씬 능률적일 것같은데 단지 개인을 통제하는 게 만만하고 쉬워서 그런다면 이 제도가 표면상의 정착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취지가 실효를 거둘 수는 없을 것이다. 재활용이 되려니 하고 정성껏 모은 것들을 처치곤란으로 내버려 두다가 훗날 기껏 태워버리기나 한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기와 무엇이 다른가.
일전에는 근린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고약한 연기에 숨이 막힐 뻔한 일이 있는데 누가 비닐장판을 태우고 있었다. 규격봉투에도 넣을 수 없고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니 오죽해야 저 짓을 할까 싶어 안 됐으면서 소각한다는 처리방법이 공기에 미치는 해독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작가>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