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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파괴시대」의 단상/박승평(일요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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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파괴시대」의 단상/박승평(일요시론)

입력
1995.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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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져가던 우리의 전통민속명절인 대보름이 올해(14일)엔 뜻밖의 관심사로 떠 올랐다. 「성밸런타인 데이」와 공교롭게도 겹치면서 유통업계의 상술까지 끼어들어 부럼·오곡밥세트와 초콜릿의 한판대결로 부추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음력 정월보름날은 첫 보름이라 한해의 풍흉과 길흉화복을 점치고, 무사하길 기원하는 뜻으로 예부터 새벽에 이명주(귀밝이술)한잔을 마시고 부럼을 깨물며 우리전통의 다섯곡식으로 지은 밥을 즐겨왔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큰 무쇠가마솥에서 지어주던 그 구수하고 감칠맛나던 오곡밥의 추억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국적불명의 수입잡곡마저 비닐봉지에 함께 담아 놓은 그 오곡밥 세트를 전기밥솥이나 압력솥에 털어넣고 타이머나 맞춰놓으면 그만인 오늘의 인스턴트 세태에서 어찌 그런 깊은 맛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보름날 식탁에 생쌀을 면한 정도의 오곡밥이 오르기만해도 그저 감읍할 따름인 것이다.

 이참에 생각나는게 하나있다. 칼국수와 설렁탕등 간편한 소찬으로 소문난 우리 청와대식단에도 대보름이니 우리곡식으로 제대로 지은 오곡밥을 이명주도 곁들여 등장시켰으면 참으로 멋이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문헌을 보면 오곡밥짓기에도 확실한 순서가 있었다. 먼저 콩을 물에 담가 불리고 팥은 삶아 건지며, 찰수수와 차조·찹쌀을 씻어 일어 놓는다. 그 다음 찹쌀·팥·콩·찰수수를 고루 섞고 받아놓은 팥물에 맹물을 보태어 보통밥을 지을 때보다 적은 물에 소금을 섞어 밥을 짓는다. 밥이 끓어 오르면 마지막으로 좁쌀을 얹고 불을 줄여서 천천히 뜸을 들인다. 뜸이 다 들었을 때 주걱으로 골고루 섞어서 그릇에 푼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곡밥의 의미란 것도 그 구수한 맛처럼 무척 깊고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우선 전통과 뿌리의식이 바탕을 이룬데다 지극한 정성의 어머니 손맛이 있으며, 한해의 간절한 기원마저 보태어지면서 다섯가지 서로 다른 곡식이 절묘한 조화로 특유의 감칠맛을 이뤄내기에 이른 것이 아니던가.

 대보름날의 오곡밥 한 그릇에서도 이런 정성과 조화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데, 어쩐지 오늘의 우리 주변은 생쌀밥투성이인 것만 같다.

 광복50년이자 세계화원년이라면서 새해 초두부터 우리정치가 또다시 펼치고 있는 케케묵은 「헤쳐모여」와 「모여헤쳐」의 후진적 행태는 역겹기 그지없다.

 거창하게 「구국의 결단」이라며 한솥밥먹기를 다짐했던 3당합당이 만5년이 지난 이제와서 솥뚜껑을 열고 보니 쌀·보리·콩이 제대로 뒤섞여 잘익어 있긴 고사하고 날곡식 그대로 여전히 남아있는 기막힌 현실이다. 그 낱알들이 또 끼리끼리 흩어져 서슴없이 갈라서고도 있는 것이다. 5년간 국민적 염원마저 담아 그렇게 불을 지폈어도 밥한그릇 지어낼줄 모르는 우리 정치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5년전 바로 본란에 「쇳물정치의 비극」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던게 떠 오른다(90년10월16일). 당시 합당후에도 대권에의 갈등으로 정치실종사태가 빚어지던 끝에 민자당3계파 수뇌부들이 포철과 광양만제철소로 화해명목여행을 다녀온 걸 보고, 용광로를 봤으면서도 우리 정치가 화합과 지도력 창출의 멜팅포트노릇을 여전히 못하고 있는건 어찌된 비극이냐고 고언했던 것이다.

 그때의 그 못된 정치망령이 문민정부의 대권창출이라는 역사적 과정과 5년의 짧지않은 세월을 거치고서도 여전히 변신하지 못했음이 실증된 오늘인 것이다.

 그래서 여당조차 말로는 철저한 자기파괴를 선언했을뿐 아니라 당총재인 대통령도 다섯가지 개혁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고, 또다시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계파를 뒤섞는 방식의 당직인선도 서둘러 끝냈음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이번에야 말로 바야흐로 우리주변을 풍미하고 있는 파괴시대의 도도한 열풍이 과연 고루·폐쇄·비타협·부조화·생산성부재의 대명사꼴인 우리 정치에서마저 한번 때깔나게 소용돌이쳐질 것인지가 안타까울 정도로 궁금하다.

 그래서 이번 대보름에는 여·야나 지위의 높낮음을 떠나서 모든 우리정치인들이 귀밝이 술로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듣게되고, 오곡밥을 들며 오묘한 화합과 조화및 지극한 정성과 기원의 정신을 깨우쳤으면 하는 또다른 단상에 빠져드는 것이다.<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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