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깨기 크고작은 업적/분단의한 「절름발이」한계 아직도 현대의 한국사학은 일제의 어용사가들이 만들어낸 식민주의적 한국사학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강점 35년동안 왜곡·조작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대사에서부터 조선사회의 전개과정, 근대국가 성립뿐 아니라 민족성까지 왜곡한 식민사관을 털어내고, 올바른 한국사학을 세우는 일은 광복 반세기를 맞은 오늘까지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합리화·정당화하기 위해 창안해낸 식민사관은 크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으로 구분된다. 타율성론은 한국사회·문화의 자주적 발전을 부정하고 외세의 영향을 부각시키는 이론틀로 지리적 결정론(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당쟁론, 문화의 독창성 결여론등으로 나뉘어진다.
한국이 반도국이라는 데서 비롯된 지리적 결정론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 때문에 숙명적으로 남에게 의지하게 돼 있다는 이론. 한민족을 수동적으로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 이론이다. 또 외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다보니 사대주의적 국민성을 갖게 됐으며 문화 역시 중국의 아류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일제의 식민진출논리를 뒷받침했다. 일제 역사가들은 한민족이 당파성과 분열성을 지니고 있어 조선왕조가 당파싸움으로 일관하다 망했다는 내용의 당쟁론과,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시대를 못 거쳐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다는 정체성론으로 우리의 역사발전과정을 무시했다.
식민사관 극복은 광복과 함께 사학계의 당면과제가 됐다. 30년대 이후 신채호 안곽(안확) 안재홍 정인보등에 의해 성립된 민족주의사학계, 백남운 김석형등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이 참여한 사회경제사학계, 이상백등 진단학회 학자를 중심으로 한 실증사학계는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가며 새로운 도약의 틀을 마련했다.
혼란스러운 정치상황과 좌우 계급갈등 속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역사학회의 소장학자 이기백 김철준 천관우등은 식민사관 타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특히 이교수는 「국사신론」(1961)을 통해 처음으로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파헤치며 대응논리를 폈다. 이교수의 주요 논점은 일본학자들의 주장 대부분이 학문적 근거가 없으며 세계역사에도 반대사례가 많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식민사관 비판은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확고한 학문적 근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50년대말 평남 궁산리와 황해도 지팝리의 신석기시대 농경관련 유물과 63년 함북 굴포리와 64년 공주석장리에서 발견된 구석기유물은 일제역사가들에 의해 부인돼온 한반도의 신석기와 구석기시대 존재사실을 밝힌 결정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논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80년대 들어 국사교과서가 식민사관에 의해 기술됐다는 논란이 벌어지고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일간의 민족감정이 악화되는 사례가 빚어졌다. 또 한국사를 잘못 소개한 외국교과서를 바로잡는 일을 계속해야 할 만큼 식민사관으로 인한 피해는 상존한다. 이기백교수는 『광복50년이 되도록 일제사관 청산을 외쳐야 하는 현실이 부끄럽다』며 『이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이유는 국민뿐 아니라 일부 학자들의 감정적 대응으로 오히려 식민주의사관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식민사관 극복방안으로 학자들은 풍부한 사료수집과 심도있는 연구, 사회과학등 인접학문에서의 접근, 국민의식 속에 잠재하는 자기비하태도 불식등을 꼽고 있다. 서울대 이태진교수는 지금까지 소홀했던 대한제국에 대한 집중연구를 식민사관 타파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침략을 정당화하려고 근대화에 앞장섰던 대한제국의 역할과 의미를 축소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한영우교수는 오는 8월의 조선총독부건물 해체를 식민사관 타파로, 새롭고 견고한 박물관을 짓는 일을 올바른 한국사관 정립의 상징으로 비유했다. 한교수는 『한국사정립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절름발이연구를 탈피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최진환기자>최진환기자>
◎역사관의 변천/민족·실증주의 거쳐 「민중사관」까지
한국사학은 식민사관 극복과 함께 주체적 한국사관 정립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50년을 걸어왔다.
광복직후 민족주의, 사회경제주의, 실증주의등 계보별로 활기를 띠어온 사학계는 6·25 이후 남북의 학문정보와 인적 교류가 차단되면서 제자리걸음을 해야 했다. 경직된 이데올로기 대결구도 속에서 사회경제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사관마저 금기시되고 문헌고증의 강단사학만 살아 남게 됐다.
60년대는 주체적 발전의 가능성을 처음 확인한 시기였다. 4·19혁명은 냉전체제에 대한 자기비판과 동시에 사상적으로 민족주의돌풍을 일으켰다. 역사이론과 역사서술, 시대구분론등이 뜨거운 논쟁을 제공했고 소장학자들은 민족의 형성문제, 발해사와 백제사, 임나일본부설등 역사의 공백부분을 집중연구했다.
이같은 노력은 70년대에 구체적 결실을 맺는다. 민족사관에 입각한 연구가 정착되면서 개설서와 분류사는 물론 통사에서도 방대한 저서가 나오고 다양한 학회가 등장했다.
80년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시대였다. 79년 제1권을 시작으로 10년간 총 6권이 나온 이 책은 40만부 가까이 팔렸고 현대사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수많은 소장학자들을 배출, 저변확대와 함께 한국사학이 일반대중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 분단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민중사관」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박천호기자>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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