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외국어로 번역하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쉽게 번역되지 않을 말 가운데 제도권이라는 말이 있다. 항상 재야라는 말과 짝지어져 사용되는 이 말은 좋은 뜻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제도권은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법과 질서의 도덕성이 의심됨으로써 제도라는 말이 별로 긍정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게 우리의 사정이었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법이나 제도가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법에의 호소가 강자의 논리를 호도하는 정도가, 아주 점잖게 말해서, 좀 지나쳤기 때문에 제도권이라는 말이 도덕적으로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현정부가 출범하면서 해낸 과감한 사정활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치가 아니라 「인치」라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엄격히 따져 당시의 사정활동이 과연 초법적으로 이루어졌는지도 확실치 않지만 문제는 과거의 정치적 비리가 대부분 법제도의 틀을 교묘히 이용해 이루어진 것이 많았기 때문에 법률의 형식논리만 갖고서는 지난 날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이 사실상 어려웠다. 따라서 인치가 아닌 법치의 주장은 형식적으로 옳지만 때로는 낯간지러운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가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아무도 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아마도 정치권을 제외한 사회의 다른 모든 부문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세계화작업을 정치와 관련하여 내용을 규정한다면 바로 제도화된 민주적 정치과정의 확립이 될 것이다. 지난해 통과된 정치개혁 입법등 여러가지 제도적 틀이 마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의 제도화작업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는 아무도 보질 않는다.
정치의 제도화란 간단히 말해 확립된 규칙을 바탕으로 지도자의 선출과 정치경쟁을 포함한 모든 정치과정이 예측가능한 경로를 따라 처리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각종 규범이 국민 각자에 내면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시간적 축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 정치사는 폭력으로 탈취한 제도를 앞세운 권위주의정권의 자기유지 노력과 그에 저항하는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민주적 정치과정은 제도화보다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개인적 투쟁과 더 친숙한 것이 되었다. 정치과정에서 다루어져야 할 실질적 문제는 외면된 채 소위 대권의 향방만이 국민의 압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도화되지 못한 우리 정치의 현실을 대단히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작년 말에서 금년 초에 이르기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 터져나온 여러가지 긴장과 갈등상태를 통해 잘 드러난 바 있다. 사실 제도화의 수준이 미미한 우리 정치에서 그러한 개인수준의 갈등은 만성적인 것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합집산을 우리 정치의 두드러진 제도적 양상으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의 경우 과거와 달리 다행한 바가 있다면 민주화가 쟁점이 아니었고 또한 정치의 불안이 사회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국 불안정이 민주화와 무관한 것이라면 불안을 낳은 갈등은 개인적 이해갈등의 것으로 그친 것이었고 정국불안이 사회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정치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장을 말해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겠지만 사회에서 야기되는 서로 갈등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는 정치의 임무가 철저히 외면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장한 사회에 상응하는 성숙된 정치가 만들어져야 할 필요는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갈등이 쉽게 그치지 않는 것은 민주화가 성취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화는 개인 지도자들의 자기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면이 크다. 그러한 희생을 바탕으로 지도권이 요구되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지만 그 요구를 다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점이 현재 우리 사회와 정치가 안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제도화된 정치라는 시대적 요청과 지도자들의 개인적 공헌에 합당한 사회적 보답 사이에 놓여 있는 갈등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하는가가 한국사회 발전의 열쇠로 보이는데 그 궁극적인 답은 국민적 판단뿐 아니라 해당 정치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적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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