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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시인 추모지방(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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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시인 추모지방(1000자 춘추)

입력
1995.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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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안 있으면 설날이다. 지금도 설 차례상 앞에 서면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그 추억에 나는 저절로 웃음을 머금는다. 정갈하면서도 애정이 가득 찬 차례 지내는 분위기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설 차례상 앞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드려라』고 말씀하셨다. 꼭 살아있는 분을 대하듯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우리들은 응석섞인 웃음을 삼키며 절을 올렸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가 절하는 걸 보시면서 웃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 많은 시인들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언제부터인가, 명절 날 차례를 지낼 때면 그들이 문득 생각났다. 죽은 시인들이 한 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러던 어느 해, 아버지 몰래 불어와 한자가 뒤섞인 지방을 썼다. 그렇게 몇 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붓으로 정성들여 써보기도 했다. 그 랭보의 지방을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보이는 곳에 붙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조상님들이 음식을 잡숫는 시간에 나는 속으로 말했다. 『랭보씨, 음식 먹는 시간입니다. 어서 드십시오』 차례가 끝나면 몰래 지방을 떼내서 뒤 뜰에 가 혼자 태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며칠이고 내 책상 속에 감춰두기도 했다.

 조상님들은 그런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허용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식구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한 번도 누구에게 들킨 적이 없었다.

 나의 이런 행동은 몇 년이고 계속됐다. 나중에는 랭보외에도 프랑스 시인 베를렌, 말라르메, 보들레르의 지방도 만들었다. 『어서 와서 드십시오. 한국 설날의 차례상을 즐겨보세요』 내 사춘기의 명절에는 이렇게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 있었다.<김점선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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