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소신」 3당합당 협력정점/문민정부이후 내리막길→결별 19일 사실상 막을 내린 김영삼대통령과 김종필민자당대표의 지난 5년여 동거체제는 반과 합의 연속이었다. 3당합당 이전에도 두 사람은 여야의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정치적 이해에 따라 기꺼이 공생을 모색했다. 이처럼 한때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었기에 서로 껄끄러운 결별이 예정됐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첫 정치적 인연은 지난 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공화당 창당을 추진하던 JP는 야당의 청년정치인 YS를 한남동 안가에서 만나 공화당합류를 권고했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여야로 갈라져있던 이들이 처음으로 맞부딪친 때는 지난 80년. 「서울의 봄」기운을 타고 모두 대권을 향해 줄달음치다 신군부에 의해 좌절당했다. 83년께 「민추협」을 조직한 YS가 미국에 있던 JP에게도 동참을 권유했으나 이번에는 JP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87년의 13대 대선에서 다시 격돌했지만 모두 꿈을 이루지 못했다.
88년 4·26총선을 통해 기사회생한 양 진영은 89년들어 4차례의 골프회동을 통해 「소신과 우정」의 연합구도를 드러내기 시작한뒤 마침내 90년 1월 22일 3당합당을 거사, 처음으로 한살림을 차리게 된다. 당초 노태우전대통령은 합당상대로 JP만을 손짓했으나 JP가 『보수연합의 명분을 위해서는 통일민주당도 끌어들여야한다』고 고집, 결국 YS도 참여케된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민자당출범후 두 사람은 사안에 따라 견제와 연대관계를 이루었다. YS의 저돌적인 행동에 JP는 자주 불만을 표시했고 90년 10월 YS가 마산으로 내려가버린 내각제각서파동때는 감정이 뒤틀렸다. 당시 JP는 YS의 행동을 「틀물레짓(어린애가 부모에게 떼쓰는 행동을 뜻하는 충청도 사투리)」이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평소지론인 내각제를 무산시킨 YS에 대한 JP의 감정적 앙금은 92년 민자당의 대선후보경선 초반 JP의 YS거부 몸짓으로 나타났다. 당황한 YS는 청구동자택으로 JP를 찾아가 지지를 요청했고 92년 4월8일 하얏트호텔 회동을 통해 간신히 「우정」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때의 소위 「4·8밀약」이 현재 JP측에서 주장하는 김대통령의 김대표에 대한 정치적 빚이다.
대선과정에서의 협력관계를 정점으로 문민정부출범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민주계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표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해 김대표측을 자극했다. 김대통령도 94년5월 민자당 정기전당대회를 통해 김대표를 퇴진시키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가 철회했다.
민주계의 결정적인 「김대표 흔들기」는 지난해 연말에 시작됐다. 「김대표 퇴진 및 지도체제개편 불가피」주장이 김대표몰락의 전주곡이었다. 『당기구개편 없다』는 김대통령의 언급으로 연말을 가까스로 넘겼지만 95년 새해벽두부터 터져나온 민자당당명변경, 지도체제개편논란은 김대표를 사실상 「시한부 생명」신세로 전락시켰다. 결국 지난 10일의 청와대회동은 YS·JP인연 33년을 정리하는 결별의식이 되고말았다.<신효섭기자>신효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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