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대가보다 과실이 더 크다”/옛동독인들 두려움벗어나 “흡족”… 작년9%성장 전유럽” “최고” 구동독 제2의 도시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1백80여 떨어진 이 도시는 통일독일의 복잡한 역사 만큼이나 여러가지의 얼굴을 가졌다. 분단시절 라이프치히는 8백여개의 기업이 있는 산업기지로 토목설비부터 컴퓨터까지 만들어냈던 공산정권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89년 9월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첫 민주시위를 벌여 공산정권 붕괴의 신호탄을 울렸다.
통일 5년후 직접 만난 라이프치히 시민들중 통일에 대해 불만을 갖고있는 사람은 있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도대체 무엇때문에 통일을 해야하는가』라는 자문을 하도록 만든 독일의 이른바 「통일후유증」을 직접 귀로 듣게 됐다. 이 지역 최대일간지인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 의 경제부장 하인케르박사는 『6만명에 달하던 이지역 섬유노동자가 일거에 1만6천명으로 줄었다』면서 『잘못된 정책으로 모두 거리를 헤매게 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국내에서 「독일 통일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이 늦어지고 있다」는 역설적인 이론이 있다. 북한은 동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리측과 교류를 꺼리고 또한 우리측은 막대한 통일비용을 보고 통일시기를 가능한 한 멀리 뒤로 미루게 됐다는 것. 결국 남북한 모두에 교훈보다는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가설은 통일독일의 「현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통일전 「통일을 위한 시위」와 통일후 「통일에 항의하는 시위」를 번갈아 벌였다는 광장을 찾았다. 한때 카를 마르크스대학이라고 불려야 했던 라이프치히대학과 구 시청(ALTE RATHAUS)으로 연결되는 광장주변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들고 흡족한 미소를 짓는 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노란빛으로 새 단장된 구시청건물 주변에 불과 3년전에 세워졌다는 고급 쇼핑가가 휘황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고 노점시장은 글리바인(끓인 포도주)을 마시며 물건을 사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남성복 보스(BOSS)대리점 지배인 볼프강 코시씨는 『92년 쇼핑가가 들어서기까지 이 지역은 밤이 되면 음산할 정도로 황폐한 곳이었다』면서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꽤나 수지가 맞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후유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흡족한 표정이다. 구동독 지역 어디를 가도 이같은 표정을 만난다.
94년 구동독지역의 경제성장률은 9%. 구동구권은 물론, 전유럽을 통틀어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90년과 91년, 같은 지역은 20∼25%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었다. 지난해말 독일경제연구소(DIW)를 비롯한 주요 연구기관들은 독일 경제가 제2의 도약대에 올라섰다고 진단했다. 통일의 후유증은 불과 4년만에 사실상 극복되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구서독지역에서도 통일비용문제는 얼마나 소요되는가가 아니라 부유층이 얼마나 부담하는가 하는 한가한 쟁점으로 바뀌었다.
불만을 늘어놓았던 구동독인들에게 『만일 90년에 통일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는 단순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인케르박사는 『만일 통일이 늦어졌더라면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사회적문제는 더욱 심화돼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됐을 것』이라고 즉각 답했다.
우리가 통일에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이 독일통일에서 나온 것이라면 통일의 「대가」를 크게 본 나머지 「과실」을 너무 작게 보아온 것같았다.<라이프치히=유승우기자>라이프치히=유승우기자>
마지막 동독총리 드 메지에르(인터뷰)
◎“동독인 불만과 후유증은”/서독인과의 경제력비교/강요된 변화서 비롯”
통일을 위해 국가를 해체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동독의 마지막 총리 로타르 드 메지에르씨(55)는 『독일통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다만 과정에 오류가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12월 베를린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기자와 만난 드 메지에르씨는 「동독인이 불행한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얼마전 체코의 한 친구에게 체코인들은 동독인보다 훨씬 못사는데 더 행복해 보이는 이유를 물었다면서 『그때 친구는 「체코인들은 자신의 처지를 과거와 비교하는데 비해 동독인들은 서독인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드 메지에르씨는 이어 『그 친구는 또 「체코인들은 스스로 변하는 반면, 동독인들은 서독에 의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두 번째 이유를 들었다』며 동독인의 불만과 이른바 통일후유증의 실체를 명쾌하게 비유했다.
그는 『통일전 서독인들이 이토록 악착같은 소유욕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동독인들을 위해 통일의 과도기를 가지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드 메지에르씨는 『독일과 러시아등 공산국가들의 실책은 과도기, 또는 이전에 관한 철학이 없었던 것』이라며 『통일전 동독의 긍정적인 유산마저 파괴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모든 재산권을 서독거주 원소유주에게 반환키로 한 원상회복정책은 가장 큰 오류』라면서 『이 때문에 동독주민은 박탈감을 느끼게 됐을뿐 아니라 소유권해결이 늦어져 동독 재건을 위한 투자가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일이 우리세대를 위해서는 늦은 것』이라면서 『그러나 젊은이들이통일로 주어진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드 메지에르씨는 『우리 세대는 68년 「프라하의 봄」이 악몽처럼 짓밟힌 이후 오랫동안 민주화의 가능성을 실감키 어려웠다』면서 『공산치하에서 과도기를 지냈던 많은 동독인들에게 역사는 새로운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 했다. 드 메지에르씨는 베를린에서 3명의 동료와 함께 세금과 동독인의 권리구제등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사무실을 설립, 운영중이다.<베를린=유승우기자>베를린=유승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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