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4·19직후 이대통령에 개헌 종용/러스크 “한일정상회담 군원에 도움”/망명 이박사 “나라 잘된다니 보고파”/박정권 “원조 보류하면 경제파멸” 미에 공문/추가파월 요청 존슨정부 “전비용 부담”밝혀 외무부가 16일 일반에 공개하는 비밀외교문서는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에 해당하는 60∼64년 사이의 국내외 정치·외교상황의 이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4·19혁명, 이승만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5·16군사 쿠데타 등 후대에까지 우리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굵직한 사건으로 점철돼 있다.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이외에 미국이 4·19직후 이대통령에게 개헌을 종용했다거나 5·16이후 미국이 군사정권에 한·일국교정상화를 권유했던 사실등이 이번 문서공개를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부분이다.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사안별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4·19,5·16을 전후한 한미관계◁
60년 4월19일 AP통신은 미국정부가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심각하게 진행되는 한국의 정정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보도한다. AP통신의 보도는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언론의 자유와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필요·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대해 이승만대통령은 4월21일 매카나기주한미대사를 불러 면담한다.
이승만:『이번 문제(4·19)는 장면 한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장이 헌법을 어기고 가톨릭교회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다. 장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증거를 대사에게 전달하겠다』
매카나기:『미국은 장이 혼자 문제를 일으킬 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들과 직접 연결되기 위해서는 국민들 사이의 혼동과 동요를 시급히 해결할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며 한국헌법에 개혁이 있어야 한다』
이승만:『현 상황을 해결하기위한 대사의 견해를…』
매카나기:『정부와 국민간의 관계회복을 위해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5·16이후 정권안정과 경제부흥을 위해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모색하는 군사정권에 미국이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를 권유하는 대목도 특기할 만하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의 방미를 협의키위해 61년11월4일부터 나흘간 딘 러스크미국무장관이 방한한다.
그는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과의 회담에서 송수반이 대한군사원조의 확대를 요구하자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정상회담이 성공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원조가 들어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것도 고려해야 할 문제다』라며 한일 국교정상화문제를 직접 거론한다.
또 러스크 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는 누구나가 다 희망하는 바로 일본도 실질적인 성의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러스크장관은 이어『양국간의 정상회담은 성과가 있으리라고 본다』며 정상회담개최를 권유한뒤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러스크장관은 그러나 『미국이 관여하는 것 같은 인상은 남기고 싶지 않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승만의 귀국저지◁
4·19혁명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박사의 측근인 최병엽씨는 군사쿠데타 9개월여만인 62년2월25일 호놀룰루 총영사관을 방문, 이박사의 조기귀국을 요청한다. 이박사의 귀국요청은 건강악화가 그 이유였는데 당시 총영사관은 정부에 훈령을 요청, 『동정을 갖는 바이나 이박사의 귀국문제는 정부에서 찬성할 시기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는 지침을 받는다.
◎“불응땐 여권무효와”
최씨는 다시 3월8일 귀국감행의사를 총영사관에 전달했으나 총영사관은 16일 본국으로부터 『박사의 귀국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귀국하지 못하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더욱 강경한 지시를 받는다. 이 때 총영사관이 받은 지시중에는 이박사가 귀국저지에 불응할 경우, 여권을 회수하거나 시급히 여권무효화조치를 취한후 본국에 보고해야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이박사는 16일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등 귀국시도를 계속했으나 당시 박국가 재건 최고회의의장은 이를 일축하는 지시를 다시 하달한다.
박의장은 『사과문 발표에 상관없이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해서는 안된다』며 『사과문을 발표하더라도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로써 이박사의 귀국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이박사의 양자인 이인수씨만이 귀국하게 된다. 이박사가 3월19일 『정부에서 하는 일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나라가 잘되어 간다니 죽기전에 한번 보고 죽었으면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다.
▷5·16군사정권의 미국 군사원조 요청◁
박정희소장의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후 61년 8월3일 당시 송요찬외무장관은 버거주한미대사에게 대한 군사원조를 간절히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다.
이 공문은 군사정권이 혁명공약에 따라 자립경제 실현을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또 이 공문은 ▲한국의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미국의 지원범위 ▲한국의 실업구제를 위한 미국의 지원책 ▲미국 원조프로그램에 의한 한국의 수혜정도 ▲특별안전기금 문제 등 6개사항을 논의하기 위한 한미 정부간 회담개최를 제안하고 있다. 일주일후인 10일 송외무장관은 버거에게 재차 공문을 보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군사원조를 거듭 요청한다. 송장관은 이 공문에서 미국이 군사원조의 감축과 함께 환기준지원액을 늘림으로써 한국의 재건정책과 실업구제가 타격을 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송장관은 내각수반이 된후에도 61년12월 19일 렘니처 미합참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멀로이 장군이 작성한 대한군사원조 감축보고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또 송수반은 당시 정일권 주미대사에게 박정희의장의 「직접분부」임을 밝히면서 렘니처 합참의장을 만나 설득하고 그 결과를 보고토록 지시한다. 송수반은 공문에서 미국이 63회계연도에 군사원조프로그램을 임시 보류하면 한국은 3백억환의 추가적인 국방예산 부담을 지게 돼 경제가 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공문은 또 박의장과 케네디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베트남파병이 거론된 마당에 한국의 군사력감축을 강요하는 원조보류는 미국에도 불리함을 강조하고 있다. 공문은 이어 『미 국방부가 도와주지 않아 한국 경제가 망하면 유감이다. 한국은 대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데 유일한 방안은 군사력감축뿐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공문을 바탕으로 정대사는 렘니처 합참의장을 만나 『한국군의 감축은 절대 반대며 동시에 한국의 고충을 처리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도록 할 것』이라는 미국의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해외원조에 목말라하던 군사정권은 63년 2월 김종필 특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김특사는 일본에서 이승만대통령 시절 설정한 평화선은 대일강경책으로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등 일본에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대베트남 군사원조◁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65년 전투부대파병 훨씬 이전에 64년 의료진과 태권도교관파견으로 시작된다. 64년 7월10일 당시 김성은국방장관은 하우스주한미군사령관에게 베트남에 파견할 1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 10명을 작전지휘에서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고 미국은 이에 동의한다. 7월15일 당시 칸 베트남총리는 『월맹에 맞설 수 있도록 한국이 가능한 적시의 지원을 해줄 것을 믿는다』는 호소문을 정식으로 전달한다.
이에 대해 당시 정일권국무총리는 8월3일 회신을 통해 앞서의 비전투요원이 파견될 것임을 알리고 『이 원조단이 공산침략자를 격퇴하고 양국간 전통적 우호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정부는 이들 군사지원단에 수당을 지급해주도록 하우스사령관에게 요청하나 『세계적 관례에 따라 파월 한국군의 봉급·일당·수당은 한국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거절당하기도 한다.
◎한·미 베트남 원조 협정
9월22일 최초의 한국군지원단이 성대한 환영식속에서 사이공에 도착한다. 이어 10월22일에는 한국군지원단의 대우를 미국사절단과 동일하게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베트남간 「한국군사원조단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다. 같은해 12월24일과 26일 미국 존슨행정부는 『비전투부대 파견과 관련, 소부대라도 좋으니 65년 1월15일까지 베트남에 도착되도록 한국정부가 최선을 다해달라』는 추가파견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주미한국대사와 번디미국무부극동담당차관보등과의 요담을 통해 전달된 비공식요청에서 미정부는 『한군군의 대우는 좋아질 것이며 비용은 전적으로 미정부가 부담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정리=고태성기자>정리=고태성기자>
◎기타 비밀외교문서 내용/한인북송 일서 「시한」 거듭연장
▷재일한인 북송문제◁
일본정부는 인도적 명목으로 일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사와의 회담을 통해 59년 8월13일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한인 북송협정」에 정식 서명한다. 이후 59년 12월24일 1차로 9백75명이 북송된 이후 62년 5월까지 모두 7만6천1백40명이 북한에 보내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 61년 8월까지였던 협정시한을 거듭 연장해 64년 11월까지 재일한인의 북송을 계속한다.
◎북 “남한송환 희망자 없다” 통고
▷납북인사 송환문제◁
휴전성립전인 53년 1월24일 북측은 우리측의 납북 민간인 무조건 송환요구를 수용할 용의를 표명한다. 남북은 이어 피랍인사의 송환에 관한 조문을 휴전협정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하고 휴전협정 조인후 54년 2월18일 협상을 가진다. 이 때 남측은 북송희망자를 70명이라고 통고했으나 북측은 남한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자가 전혀 없다고 통고한다. 이후 북측은 외국인 19명만을 송환했을뿐 남한출신 피랍자는 단 한명도 돌려 보내지 않았다.
◎화협조로 63년 유해 발굴·봉환
▷이준열사 유해봉환◁
63년 6월 이준열사의 기념사업단체인 일성회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안장된 열사의 유해를 봉환키위한 캠페인을 벌이자 정부는 관련국과 외교교섭을 시작한다. 63년 8월에는 열사의 유해봉환식을 국민장 규모로 거행키로 하고 일성회와 관련부처가 합동으로 실무자 회의를 구성한다.외무부는 네덜란드 당국의 협조로 헤이그 현지에서 유해발굴식및 화장식을 가진뒤 10월2일 유해를 봉환, 10월5일 국내에서 유해봉환식을 거행한다.
◎공산측 “중립국 참여” 제기 결렬
▷휴전후 한국정치회의의 무산◁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조인후 90일내에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적 정치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바 있다. 8월29일 이승만대통령은 『정치회의서 통일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군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 것』이라는 강경성명을 발표한다. 10월26일부터 정치회의를 위한 예비회담이 시작됐으나 공산측이 중립국참여문제를 제기하자 이를 반대한 미국측 딘대표가 회담장에서 퇴장함으로써 12월12일 예비회담은 결렬되고 국제정치회의는 무산되고 만다.
◎「포로발포」로 인도군 축출 결의
▷반공포로 석방◁
53년 9월10일 이후 북송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2천4백87명이 인도군의 관리하에 들어간다. 10월1일 인도군이 반공포로에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회는 인도군 축출결의안을 가결시키는 한편 정부는 반공포로 석방을 위한 무력행사를 통고한다. 11월17일 덜레스미국무장관이 반공포로의 자유보장을 언명하고 54년 1월2일 중립국송환위는 반공포로석방을 가결해 이들은 1월23일 전격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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