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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지신밟기/박승평(일요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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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지신밟기/박승평(일요시론)

입력
1995.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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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력으로라도 정초가 되어서인지 어릴적 이맘때면 고향마을을 휩쓸었던 지신밟기놀이의 추억이 새롭다. 울긋불긋 큰 깃발을 든 기수, 점잔빼는 사대부, 익살맞은 표정의 포수등을 앞세운 농악대가 한바탕 마을을 돌며 신명나게 놀고나면 마을주변을 감쌌던 음기가 눈녹듯 사라지면서 화기와 웃음소리로 가득찼던 것이다.

 한 해의 수확과 풍요를 내려준 땅의 신을 달래고 잡신과 악귀를 물리쳐 마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던 그 소박한 놀이와 착한 사람들에의 향수를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달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이 각박하고 불안정해질수록 도심에서일망정 한바탕 지신밟기 놀이판이라도 벌여야 꼬여만 왔던 일상사들이 새해부터는 시원히 풀릴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새해란 제2의 광복과 함께 세계화로 가는 원년이라는데, 나름의 간절한 기원이 없을 수가 없겠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지신밟기의 추억으로나마 기원과 덕담을 대신하고픈 것이다.

 사실은 또다른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그렇게 붕괴·침몰·추락·폭발·하극상과 탈영·연쇄 세금도둑질등이 요란했던 것도 모자란다는듯 새해마저 시작과 함께 어쩐지 조용하고 차분해질 구석이란 없어보인다.

 정치의 세계화와 통합정치를 도모하자면서부터 밀어내기·퇴진·중대결단·회사(정당)의 실제 오너(주인)와 실속없는 대리인 대표등 등의 소리가 왜 그렇게 요란한지 모르겠다.

 세계화의 원년이라면서 실제로 당장 눈앞에 닥친건 부동산실명제 전격실시라는 과거의 청산문제부터였다. 예부터 쌓여 온 미결의 과제들이 너무 많아 미래로 뻗어 나가기보다는 과거로의 미망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명과 명의신탁의 처벌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는 과거문제가 오히려 국가적 중대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장교길들이기와 유례없는 장교무장탈영도 모자라 엘리트장교의 은행강도짓이 돌출되고 있는가 하면 전국 특감으로 잠잠해질 줄 여겨졌던 도세범죄가 서울전구청으로 보다 지능화되어 확산되는 충격인 것이다. 당초의 자체감사나 감사원감사로도 드러나지 않았던 서울시내 구청의 비리가 이번에는 자체감사만으로 드러나기에 이른 걸 보노라면 오늘의 우리사회가 마치 온갖 과거귀신에 씌워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엊그제 공보처가 우리의 부문별 세계화 지표를 가시화하면서 오늘의 우리 정치수준이 5%에 불과하다고 기술했던게 생각난다. 그래서 그런지 국민적 염증이나 세계적 무한경쟁과는 상관없이 우리 정치가 곧 잘 하는 일이란게 무한정의 과거따지기와 무분별한 흔들기의 연속인 것만 같게 여겨진다. 구국의 결단이라 했던 5년전의 3당 합당이 그동안 화학적 통합조차 이루지 못해 이제와서까지 끼리끼리 여전히 지분이나 따지고 있으며 미래에의 비전을 주지 못할 바에야 우리 사회나 민심이 안정이라도 이루어가야 할 게 아니겠는가.

 옛 신라시대 고운(최치원의 호)의 표현처럼 현묘하면서 멋스러운 풍류의 정치가 그래서 마냥 기다려지는 것이다.

 사실 국제정세나 국민의 생각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이제와서 정치권의 어느 누가 누구의 뒷덜미만 계속 잡고 늘어지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리정치권에서도 레이건이 요즘 앓고 있다는 치매증운운하는 소리가 들린다. 또 주치의가 쓴 전기로 말미암아 요새 여지없이 발가벗기우고 있다는 마오쩌뚱(모택동)소리도 있는 모양인데 모두가 딱하기만 하다. 세계화로 미래로 곧장 뻗아나가야 함을 누구나 알면서 언제까지 노망만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예부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게 있다는데, 정초부터 지신밟기의 사설이 너무 횡설수설인 감이 없지 않다. 지신밟기로도 모자란다면 예부터 음력 섣달 그믐날밤 우리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풀어졌다는 나례의식의 사설로라도 삼아 못난 정치귀신과 떨어질 줄 모르는 과거귀신·흔들기귀신만은 기어코 다스렸으면 좋겠다. 양력으로는 요즘이야말로 지신밟기의 타이밍이고, 음력으로는 이달 30일이 섣달 그믐이기에 곧 나례의식을 펼칠 때인 것이다.

 세계화로 뻗어가려는 원년이라면서 오히려 토속적이고 구태의연한 지신밟기를 해서라도 과거의 망집에서 벗어나고픈게 필자만의 비원은 아마 아닐 것으로 자위해 보는 영하의 차가운 엄동이다. 고향의 그 꽹과리·징·장구소리가 이제라도 들리는 것 같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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