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재결집 “현실비판” 회합등 잇따라/60연대말「대학운동권 백서」 출간 파문 낳고 지난해 11월20일 하오 도쿄(동경)대 고마바(구장)캠퍼스 11호관에서는「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단혼의 세대는 우리들에 말한다」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68, 69년 「대학투쟁」당시 운동권의 대명사였던 동경대 전학공투회의(약칭 동대 전공투)멤버들이 25년동안의 침묵을 깨는 자리였다. 동경대의 정기축제인 고마바사이(구장제)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토론회에서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왕년의 투사들이 자식뻘인 후배들에게 『사회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침묵을 깬 것은 동대 전공투만이 아니다. 이미 지난 90년 과거 와세다(조도전)대 전공투멤버들이 집회를 갖는 등 90년대 들어 당파를 초월한 운동권출신들의 회합및 젊은 세대와의 토론회가 잇따르고 있다.
또 지난해 8월 전공투 출신인사 2백56명의 설문결과를 담은 「전공투백서」가 서점가에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의원 의사 사업가 평론가 예술가 회사원 자영업등 다양한 직업의 응답자들은 학생시절보다는 다소 완화되긴 했으나 평균적인 일본인들에 비해서는 확연히 강한 목소리로 일본의 현실을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했다.
일본 현대사를 풍미해 온 보수주의의 거센 물결속에 20여년의 침묵을 강요받았던 전공투멤버들이 최근들어 자기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세기말 변화의 시대를 맞아 다양한 모색에 들어가 있는 일본사회의 한 단면이랄 수 있다.
동대 전공투출신인 이마이 기요시(금정징)참의원의원(사회당)은 『전공투를 젊은이들의 일과성 반란으로 흔히 보고 있으나 지금도 환경 인권 주민운동등 신사회 운동에 전공투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장애자가 보통학교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하는 회」회장인 사이슈 사토투(최수오·58)씨는 『현재의 일본사회의 중추는 적극적 참가자였건 반대자였건 방관자였건 68, 69년의 대학투쟁을 거친 세대』라면서 『관료등 체제내 인사들중에는 적극적 참가자가 희소하지만 기타 사회운동등은 적극적 참가자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도쿄대 혼고(본향)캠퍼스 야스다(안전)강당에서의 치열한 공방전을 끝으로 사실상 쇠퇴했던 전공투에 대한 기성사회와 일본보수주의의 냉대는 혹독한 것이었고 상당수의 전공투멤버들은 정상적인 사회적 성장을 차단당했다.
이마이의원이나 가토 고이치(가등 굉일)전관장방관, 하세 유리코 전중의원 의원등 정치적인 진출에 성공한 경우도 있고 변호사 회사경영인 의사 등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인사들도 상당수 있지만 대부분의 전공투멤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투쟁당시에도 10%내외였던 이들이 「일본사회를 움직이는 또 다른 한 축」임을 자임하면서 최근들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출판, 언론계등 여론주도직종 종사자들이 많은데다 명목소득 세계1위를 자랑하면서 생활대국과는 아직도 거리가 먼 현실과 연관돼 있다.
최근들어 소리높은 일본사회개조론등은 과거의 폭력투쟁노선과는 오래전에 결별한 운동권주류의 목소리와 일치해 있다. 또 시민운동등이 생활속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현실이 토양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도쿄=황영식기자>도쿄=황영식기자>
◎전공투란/68년 동대서 첫결성 학생운동권
68년 도쿄대 의학부 학생들의 야스다강당 점거농성을 대학측이 기동대를 요청해 강제해산한 사태로 전국적인 학생궐기가 있었을 당시 전학련등 기존좌파 학생운동조직과는 별도로 일반학생이 대학별로 조직한 운동단체. 실제로는 69년 도쿄대 투쟁이 막을 내리기까지 이외에도 여러 좌익분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나 무장투쟁등을 선포한 결과 전체운동단체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됐다.
◎69년 「도쿄대 투쟁」 참가 촌강도씨/3번체포 실형… 현재 신좌익 이론가 활동
『일본의 신좌익은 후퇴와 침체를 거듭하고 있지만 인간의 권리 확보를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60년대말 일본을 휩쓴 전공투의 물결은 단순한 학원내의 홍역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후배들의 싸움에 참여했고 대학직원등 일반인들도 가세했다.
당시 대학병원의 직원으로「도쿄대 투쟁」에 참가, 대중연설을 하는등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무라오카 이타루(촌강도. 51)씨는 그날 이후에도 일본사회의 변혁을 모색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외에는 결코 후회가 없다』는 그의 외길은 전학련의 국회점거농성으로 절정에 달한 「60년 안보투쟁」을 대하면서 시작됐다.
당시의 사태로 사회문제에 흥미를 느낀 그는 우연히 구하게 된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수고(수고)」중 「소외된 노동」을 읽고 구조적 변혁만이 모순의 해결책이라는 의식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고교졸업후 바로 도쿄대병원의 직원으로 취직한 그는 60년대 신좌익운동 흥성기에 최대당파인 중핵파에 가입, 활동했고 68, 69년 도쿄대 투쟁당시에는 직원투쟁조직에 참가, 소그룹을 이끌었다. 야스다강당의 함락이후에도 신좌익당파간의 폭력적인 싸움에 매달렸던 그는 3번째로 체포돼 1년3개월의 실형을 마치고 난 73년 중핵파를 탈퇴했다. 이어 트로츠키가 조직했던 국제사회주의 운동그룹 제4인터내셔널에 들어갔다.
80년 다시 이를 탈퇴하고 지금은 이나즈마(도처:번개)라는 소규모 정치집단의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엄청난 독서로 대표적인 일본 신좌익 이론가의 한사람이 된 그는 일본내 20여개의 신좌익계 정치집단과 마찬가지로 소련식 사회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소련의 붕괴를 시장경제체제의 승리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류의 역사상 시장경제의 시기는 아주 짧은 것』이라며 『우애와 연대, 자연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도쿄=이대현기자>도쿄=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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