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로 토해낸 현실의 혼란 문학평 필진이 바뀝니다. 시는 김인환(고려대국문과)교수, 소설은 최원식(인하대 국문과)교수가 맡습니다.<편집자주>편집자주>
이수익 조정권 이성선 최동호는 세번이나 4인시집을 내놓았다. 기법이나 취향, 특히 세계를 보는 시각에 서로 통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유사한 것은 분위기이고 말과 삶을 얽어 짜는 구체적인 방법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시사의 한 극단에 소월을 놓고 다른 한 극단에 이상을 놓은 후에 우리 시인들을 그 사이에 배치하면 네 시인이 이승훈 민용태 박남철 하재봉등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은 분명히 드러난다. 다시 그 네 시인 중에서 이수익을 이상쪽에 가깝게, 이성선을 소월쪽에 가깝게 배치해야 할 것이다.
이성선은 새벽에 일어나 산을 향해 절한다. 사물의 뜻이 아니라 사물의 빛을 추구하는 그에게 시는 산을 향해 섰다가 자기에게 돌아서는 자연참배이다. 이성선은 순수지각의 현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시를 쓴다. 조정권에게도 이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시」 1월호에 실린 「레벤호프」에서 조정권은 이성선과 거리를 두는 방향에서 사물에 접근하여 순수지각에의 믿음을 방해하는 불순한 시의 환경을 포섭하려고 시도하였다. 놀랍게도 조정권은 현실의 혼란과 위기를 다루면서도 고전시의 형식을 완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4음보의 기조에 여러 가지 각운을 배합한 운율과 시조투의 마무리어법은 형식의 안정성을 견고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대는 줄이고 줄여 이천씨씨만 마시시라 나는 밤 바깥으로 이차집을 뚫어 놓고 거품에 정들이리>그대는 줄이고 줄여 이천씨씨만 마시시라>
이러한 고전시의 운율과 어법이 멸치를 안주로 해서 생맥주를 마시는 장면에 녹아들어 있다. 그대는 줄이고 줄여 거품 천씨씨를 마시고 나는 늘리고 늘려 거품 오천씨씨를 마신다. 내가 더 마셨으므로 나는 그대에게 줄이더라도 이천씨씨는 마셔야 한다고 권한다. 반 이상이 거품인 생맥주는 반 이상이 거품으로 흘러가 버린 시인들의 나이와 겹쳐지고 「똥을 그대로 두고 대가리만 똑똑 따낸 며르치」는 눈조차 말라버린 머리 속에 몸뚱이를 억지로 구겨 넣고 맥주잔처럼 공허한 가슴들을 부딪치는 중년의 시인들과 겹쳐진다.
고전시의 안정된 형식이 과연 현대인의 불안한 공허를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은 아직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각의 순수함만이 아니라 환경의 불순함도 시형식의 탐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