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기치가 화려하기는 하지만 그 그려진 의미의 모호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김영삼대통령의 지난 기자회견에서 그것이 바로 세계 일류국가를 만들자는 뜻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결국 하루 빨리 선진국대열에 끼여야 하겠다는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다. 흔히 세계화를 WTO(세계무역기구)와 연관시켜 왔으나 그것이 광범위한 선진화를 뜻한다면 정치·문화·인권과 복지등 모든 분야에서 크게 도약하자는 말이 된다. 지난 한 해, 되돌아 보기조차 싫은 어지러웠던 세태는 우리가 수준 미달의 후진국임을 자탄케 하면서 국가존립의 참뜻을 되새겨 보게 하기까지 한다. 나라란 자연발생적인 단순한 지역집단이 아니며 분명한 존립목적이 있고 그를 위한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이 바로 법일진대 현대민주국가의 법은 권력자와 백성과의 약속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의 행복추구를 위한 그들 자신의 자율적인 약속이며 그 약속이 법으로의 힘을 갖기까지에는 정당한 약속의 과정, 즉 정당한 절차의 보장이 앞서야 한다. 아무리 법의 목적과 그 실체가 정의로운 것이라 하여도 그 만들어진 과정이 사실상 권력자의 의사에만 의존케 된 것이라면 그 형식이 갖추어졌다 한들 진정한 뜻의 법이 될 수 없다. 절대군주치하의 법이 오늘의 참뜻의 법이 아닌 연유가 여기에 있다. 「법은 절차이다」라는 서양의 격언이 이를 말함이다. 국회라고 하는 곳에 시민의 대표가 모여 시민의 뜻을 받들어 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정부가 그 법을 집행하는 제도가 옳은 것이라면 그러한 뜻에서 국가의 통치권자는 그 국민 스스로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정부의 과감한 개혁실천에 많은 찬사를 보내면서도 간혹 개운치 않음이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후보가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한국병(병)의 치유, 안정 속의 개혁은 그 실행의 마당에서 과감한 개혁을 통한 안정과 그 치유로 수순이 바뀌었고 그로 인해 집행기관인 정부가 사실상 입법기능의 일부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93년8월 금융실명제가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라는 이름으로 시행됐다. 그 실명제는 일찍이 다수 국민의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던 터라 아무도 그 제도를 원초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란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대통령은 최소한으로 필요한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는 헌법규정이 그 법적근거이고 지난날 군사정권이 몇 차례의 통화개혁에 활용했던 법조문이다.
최근 중앙행정조직의 개편이라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정부조직법이라는 법률개정을 뜻하며 그 개정은 입법부의 몫이다. 정부측의 발표는 그 개편의 규모, 구체적 내용과 그 실시의 시한까지 동시에 알려 주었다. 그 개정법률에 따른 하부조직의 직제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보도됐다. 두 가지 모두 통상의 절차로는 그 개혁의 실현이 쉽지 않으므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함이 그 명분이다. 현대국가에 있어 행정현상의 다양화, 행정권력의 비대 필연성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 일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법에 의한 적절한 절차의 보장이며 진정한 법치의 구현이다.
지난 연말 국회는 정쟁에 휘말려, 시한에 쫓겨 수많은 중요 법률안을 변칙적 방법으로 힘없이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우리는 그 「통과」라는 표현에 많은 저항을 느낀다. 입법기관이 통과기관으로 전락됨은 대표권을 준 국민에게 옳은 일이 못 된다. 법의 집행자인 행정부가 법을 그의 뜻한 바대로 만들어 낼 때 그 법은 국민 편에 선 법이 못 되고 행정편의적이며 관권의 전횡을 가져 오는 법이 되기 쉽다. 가뜩이나 오늘날 행정의 전문성·기술성 때문에 법률이 골격과 원칙만을 정함으로써 법률은 겉모습만 있을 뿐 행정입법으로 국민의 권리의 한계와 의무가 좌우되는 실상 아래서 법률입법마저 내맡기는 국회를 국민은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최근에 수사기관의 인권억압이 고개를 든다 한다. 「밤샘수사」니 「귀가조치」니 하는 위법을 말하는 단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공공연한 상용어가 되어 버렸는가 하면 그 부끄러운 고문의 소식마저 들리고 있다. 피의자·피고인에 대한 무죄의 추정은 공염불이 되어 있어도 누구 하나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금년은 정치과열이 예상되며 그 와중에서 정치적 혼란은 자칫 법경시의 들뜬 분위기를 가져 오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지금 성숙된 법치주의의 정착 노력없이 참다운 개혁이나 세계화가 뜻대로 촉진되기 어려움을 다 함께 깨달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변호사·전대한변협회장>변호사·전대한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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