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진입을 목표로 한 한국경제의 질주는 각종 경제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있다. 광복당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줄잡아 1백달러 미만에 불과했다. 지금의 아프리카 후진국수준이다. 통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정확한 수치는 없다. 한국은행이 GNP통계를 처음 발표한 것은 6·25직후인 53년. 전쟁으로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당시의 GNP는 13억5천만달러, 1인당 GNP는 67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금년의 1인당 GNP는 9천3백39달러, GNP는 4천1백89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신경제 5개년계획). 42년만에 GNP는 3백10배, 1인당GNP는 1백39배 증가한 것이다. 교역규모의 증가속도는 더욱 빠르다. 48년의 수출과 수입은 각각 1천4백만달러, 1천8백만달러로 교역규모가 고작 3천2백만달러에 불과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94년 우리나라의 수출이 1천42억달러, 수입은 1천80억달러로 교역규모가 2천1백22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계했다. 교역규모가 48년만에 6천6백31배 늘어난 것이다. 미국의 워튼계량경제연구소(WEFA)는 한국의 경제규모와 교역규모가 93년에 세계 13위를 기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WEFA는 향후 5년이내에 한국은 경제규모와 교역규모에서 세계 10위권(G10)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나라살림살이규모(일반회계)는 49년 1천1백12억원에서 95년에는 50조1천4백11억원으로 4백51배 늘었다.<김경철·김광덕기자> ◎1인당 GNP 김경철·김광덕기자>
광복이후 50년동안 한국인의 생활이 얼마나 급변했는가를 가장 잘 웅변해주는 것은 1인당 GNP. 본격적인 경제통계조사가 시작된 53년의 1인당 GNP는 67달러였다. 그러나 94년에는 1백22배인 8천1백96달러(신경제 계획치)에 이르렀다. 광복 50년인 95년에는 9천5백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1만달러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산업구조
광복 당시 공장다운 공장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박정희전대통령 집권직후 경제개발계획이 의욕적으로 추진되면서 서울구로공단, 울산 석유화학단지등 대형 「공장숲」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체 산업에서 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산업구조는 광복당시 2차산업비중이 낮아 허리가 잘록한 호리병모양에서 1차산업보다 2차산업, 2차산업보다 3차산업의 비중이 큰 역삼각형, 즉 선진형으로 바뀌어왔다.
◎무역 규모
무역은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수출지상주의 내지 수출드라이브정책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겠느냐고 단언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의 교역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주력수출품도 텅스텐등 1차상품에서, 신발등 노동집약적 상품을 거쳐 반도체 자동차등 기술집약상품으로 전환됐다.
◎산업생산력
공산품 생산능력도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기계산업의 총아인 자동차의 경우 광복당시 국산은 거의 없었지만 93년에는 2백5만대(세계 6위)를 생산했다. 또 조강생산은 세계 6위(93년)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간판노릇을 했던 섬유산업은 성장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지난해 화섬 세계 9위, 직품제조 7위, 면방 13위로 관록을 지켰다.
◎무역의존도
우리는 무역으로 먹고 살아왔다. 무역에 의존하는 비중이 80년대부터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역은 생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황무지에서 세계 13위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과정 그 자체가 우리 경제성장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총생산에서 교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인 무역의존도는 60년 20%에서 경제개발사업을 거치면서 80년에 65.8%로 높아졌다. 이후 내수산업 발전으로 감소세로 돌아서 94년에는 51.7%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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