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가난한 겨울(장명수칼럼:1761)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가난한 겨울(장명수칼럼:1761)

입력
1994.12.26 00:00
0 0

 며칠전 택시를 타고 가다가 좀 무안한 일이 있었다. 날씨 이야기를 하던 택시 기사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온다는군요』라고 말했는데, 즉각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맙소사』였다. 『그렇지 않아도 교통이 복잡할텐데 눈까지 내리면 큰일이네요』라고 나는 덧붙였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무슨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십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내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특히 젊은이들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눈이 내리면 가장 고생하는 사람이 택시 기사들이지만, 나는 눈이 싫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내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자 그는 계속했다.

 『마음을 야박하게 먹으면 한이 없습니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마음을 후하게 가져야지요. 아무리 부자라도 마음이 야박하면 가난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공연히 눈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톡톡히 설교를 듣게 된 나는 어느덧 그 설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릴거라는 말에 짜증부터 낸 나는 얼마나 삭막한 사람인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무엇 하나 따뜻하게, 긍정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와, 눈이다』라고 환호하며 눈을 맞이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해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덕수궁 등넝쿨아래 벤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진 애인들이 노인이 될 때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소설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중학교때 친구가 생각난다. 「눈이 내리는데」라는 연속 방송극 주제가를 잘 불러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던 고교친구도 생각난다. 이제 눈은 더이상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지 않는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는 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교통지옥 걱정이 앞선다. 길이 미끄러우면 어쩌나, 차가 밀리면 어쩌나, 눈이 녹을 때 질퍽거리면 어쩌나라는 유치한 근심으로 나는 눈을 맞는다. 탐스런 함박눈도 웅크린 내 어깨를 부드럽게 펴주지 못하고, 휘몰아 치는 눈보라도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멀리 발자국이 찍히는 눈길도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나는 눈을 맞으며 눈을 느끼지 못하고, 혼잡한 현실만 느낀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는 빗나갔다. 눈대신 포근한 날씨가 봄날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생각했다. 『눈이 내리면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 택시기사지만,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안왔으면 좋겠다는 야박스런 생각은 안합니다』 그의 말은 크리스마스 카드에 적혀 배달된 것처럼 선명하다. 내 가난한 겨울을 그가 흔들어 주었다.<편집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