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집근처 방마련 새삶 시작/그들의 광기 아직도 이해못해/속죄심정 희생된소씨 두딸 동생처럼 돌보고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지존파일당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그 때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빨리 잊고 싶어요』 지존파 일당에 붙잡혀 잔혹한 살인 현장에 끌려다니다 탈출, 이들의 만행을 고발한 이모(27·여)씨는 악몽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을 충격과 분노속에 몰아 넣었던 살인마들은 지난 10월31일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아직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다.
사건 직후 극도의 정서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그는 지난달 대전 큰언니집 근처에 전셋방을 마련,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혼자 바깥 출입도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다. 20일 하오 기자의 거듭된 설득에 외출을 한 그는 죄지은 사람처럼 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나타났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운 듯 주위를 둘러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
『그들의 살인행각이 끔찍했어요.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에 치가 떨렸지만, 내색조차 할 수 없었어요. 「이대로 잡혀 있다가 죽을 순 없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고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씨는 가혹한 시련을 안겨 준 지존파 일당에 대해 『죄는 밉지만 그들도 불쌍한 존재란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평소 행동거지만으로는 흉악한 인간성이 숨겨져 있다고 믿기 어려웠어요. 무엇이 그들을 광기와 같은 살인 행각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존파 일당이 교도소에서 종교서적을 읽으며 참회하고 있다고 알려 주자 『지금은 얼굴도 다시 보기 싫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한번 찾아가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인간들을 만든 이 사회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씨는 『그 일을 당하고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하고 세상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욕심없이 살고 싶다』고 밝혔다. 사건후 이씨에게는 각계에서 3천여만원의 성금이 답지했다. 그는 이 돈으로 새해 1월 조그만 잡화점을 열 계획이다.
그동안 지존파에게 희생된 소윤오씨 부부의 두 딸 현숙(15)양 자매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두어번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현숙양 자매가 마음을 열 때쯤 되면 동생처럼 돌봐 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혔다.【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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