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가는 1994년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 초대형 사건·사고로 얼룩진 한해였다.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 살인공장을 차린 지존파, 부녀자 연쇄 납치살해범등이 단군이래 초유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육·해·공·지하 곳곳에서 인재에 의한 사고가 빈발, 국민을 엄청난 충격과 불안, 분노와 허탈속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국민의 혈세를 일 삼아 횡령한 세금도둑질이 만연돼있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자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올 한해 부끄러운 사건 사고를 두 차례 특집으로 정리한다.【편집자주】◎특감공무원도 「비리사슬」얽혀/풀어진 공직윤리 바로 세워야
올해 발생한 대형사건들은 총체적인 사회병리현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공무원들이 국민혈세를 쌈짓돈쓰듯 횡령하는가 하면 인륜상실의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엄정한 군기가 생명인 군인들의 기강이 풀어져 장교들이 무장탈영을 하고, 전국의 궤도 교통이 마비돼 국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사건이 터져 국민이 놀랄 때마다 정부는 「대책」을 내놓았으나 피부에 와닿는 것은 별로 없었다.
▷공직자 사건◁
인천 북구청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세금도둑질 사건은 전국으로 확대돼 아직 뒷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허울 뿐인 자체감사의 실체가 드러났고, 특감공무원이 비리의 장본인으로 밝혀지는등 웃지 못할 일들이 꼬리를 잇고 있다.
인천에 이어 부천 3개구에서도 비리가 터지자 정부는 조세저항을 우려, 건국후 최대규모의 정부합동감사반을 편성해 전국의 시군구를 대상으로 감사에 나섰다.
정부는 부정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으나 세무행정의 간소화, 공무원의 공복의식, 공무원과의 결탁으로 「나만 세금 덜내면 그만」이라는 납세자의 의식등이 개선되지 않는 한 비리는 재발할 수 밖에 없다.
철도·지하철 파업은 가뜩이나 교통체증에 지친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시민을 볼모로 한 노조와 정부의 강경일변도 대응 때문에 사태는 악화됐다.
군기가 생명인 부대에서 어처구니없게 발생한 장교무장탈영, 사격장 총기난사등 군기문란 사건은 군기강확립 대책안과 교육 개선안등을 내놓게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크고 작은 군기사건이 발생, 국민들을 당혹케 했다.【선년규·김동국기자】
▷세무비리◁
9월초 인천 북구청 말단여직원의 지나친 사치행각이 수사기관에 포착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세무비리는 불과 1백여일만에 부천시 3개구, 서울 영등포·양천·강남구, 부산 해운대구등 전국 50여곳에서 세무비리가 들통났다.
지금까지 밝혀진 횡령액만도 인천 북구청 78억여원, 부천 3개구 31억원등 1백억원대를 훨씬넘어 「세도공화국」이란 국민의 분노가 증폭됐다.
취득세와 등록세를 주대상으로 가짜 영수증을 발부하는 수법으로 혈세를 주머니돈 꺼내듯 착복해온 세도들은 6급이하 하위직 공무원들이 대부분으로 상급자등에게 뇌물을 상납, 연결고리를 형성해 범행을 은폐해왔다.
특히 일부 법무사들이 연결고리로 깊숙이 개입한 것은 세무행정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부천시민 대책회의 결성/분노한 시민들 「도세감시」나서/“제도개혁없인 재발” 세무쇄신 촉구
정부의 대규모 특감에서 세무비리가 속속 드러나 「세금있는 곳에 도둑있다」는 말이 실감나게 들린다.
인천 북구청에 이어 11월21일 부천의 조직적인 도세사실이 알려지자 분노한 시민들이 일어났다.
부천YMCA 부천경실련등 7개 시민 재야단체는 12월5일 부천시민대책회의(대표 이창식·49·부천YMCA총무)를 결성했다.
이대표는 『사무실을 차리자마자 「분통이 터져 못살겠소. 차라리 내무부장관더러 세금을 받아가라 하시오」등 분노한 시민의 전화가 잇달아 이 사건의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5천여장의 영수증을 들고 대책회의에 찾아와 진위여부를 가려달라며 전폭적인 성원의 뜻을 전했다. 대책회의는 시민들의 의뢰로 시청과 구청에 확인대조를 요청했다.
이대표는 『지금까지 밝혀진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제도적인 개혁없이 단순한 특별감사로 몇몇 곳만 적발하고 서둘러 덮어버리면 부정은 재발된다』고 세무행정의 일대쇄신을 촉구했다.
부정과 비리소지를 밝히는데 시민들의 폭넓은 동참을 끌어낸 것을 큰 성과로 꼽고 있는 대책회의는 확보한 영수증과 수배자들의 행적에 대한 제보등을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시민들의 혈세감시에 나섰다.
대책회의는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가동되지만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간사급 임원을 파견, 시민참여 속에 다시 활동할 방침이다.
이대표는 『시민들이 행정에 직접 참여하는 성숙한 시민사회가 이뤄져야 후진국형 비리사건등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부천시민대책회의는 선진국으로 향하는 시민운동의 초석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염영남기자】
▷박한상 패륜사건◁
5월19일 미국에 유학중이던 박한상(23)이 상속재산을 노려 부모를 등산용 칼로 난자, 살해한 뒤 방안에 불을 질러 실화로 위장했다. 박의 아버지 박순태씨가 대한한약협회 서울시지부장을 맡은지 얼마되지 않은데다, 잔혹한 범행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 사건은 1주일만에 희대의 패륜범죄로 밝혀져 온 국민을 경악케 했다.
박은 애꿎은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재판과정에서도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아 「인간이 저럴 수도 있는가」하는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우리의 빗나간 교육열, 물질만능풍조등으로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박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 계류중이다.
▷지존파·온보현사건◁
시체소각로를 갖춘 아지트를 마련해놓고 소윤오씨 부부등 5명을 납치, 살해한 지존파 일당 6명의 살인행각은 추석연휴를 충격의 도가니속으로 몰아넣었다. 지난해 7월 길가던 20대 처녀를 붙잡아 살인연습까지 한 이들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의 고객명단까지 입수해놓고 부유층의 무차별 살해를 계획했던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가중시켰다.
온보현은 9월1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귀가중이던 허모(26)양을 훔친 택시로 납치, 경기 용인군 야산에서 살해하는등 불과 보름동안 부녀자 6명을 납치해 3명을 성폭행하고 이 중 2명을 살해했다. 은행 폐쇄회로TV로 신원을 파악한 경찰의 추적을 받자 자수한 온은 범행을 낱낱이 일지형식으로 기록,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지존파 일당과 온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계사 폭력사태◁
서의현 전조계종총무원장의 3연임을 저지하기위해 조계사에서 농성중이던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측 스님들을 서원장 지지승려들이 3월29일 폭력배들을 난입시켜 폭행하고, 경찰이 농성승려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50여명이 부상했다.
다음날 파행적으로 열린 임시중앙종회가 서총무원장의 3선을 결정했으나 전국에서 모인 범종추측 스님 2천여명은 4월10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 개혁회의를 결성하고 서원장의 해임및 승적박탈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서원장은 경찰수사에서 측근들이 폭력배를 동원한 것으로 드러나자 4월13일 사퇴함으로써 사태는 보름만에 일단락됐다. 개혁회의는 경찰의 조계사 진입을 제2의 법난으로 간주, 정부를 강하게 성토하기도 했다.
11월21일 송월주스님이 직선으로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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