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한 장만 남고나서부터는 송년모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자리라 해도, 사람들이 몇 사람만 모이면 자연스럽게 올 한 해를 돌이켜보는 소리를 하게 된다. 그동안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또 한 살을 먹게 된 걸 서로 축하하며 대견해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지뢰밭을 건너온 사람들같다. 금년이 개해였다는 것을 빗대어 『실로 개같은 한해였다』고 자조하는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 개가 들으면 『예끼 이 사람아, 무슨 그런 모욕적인 소리를…』하고 화나 내지 않을지 모르겠다. 내년은 돼지해니까 재물복이나 식복을 돼지에 빗대어 온 오랜 관습상 서로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자고 축수하는 덕담을 주고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런 뜻으로 돼지는 십이간지의 짐승중 우리 민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짐승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남에게 받고 싶은 최상의 대접도 사람대접이다. 한 해를 보내기 전에 성탄절이 있는 것도 올해라고 다를 리가 없다. 택시를 타도 캐럴이 들리고 백화점 아니라도 상점마다 크리스마스장식이 볼 만하다. 밤의 번화가에서 온 몸에 불을 켠 나목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이지만 허구의 미라는 것으로는 우리의 잘 사는 모습과 유사하다. 성탄절을 맞기 전에 가톨릭신자는 고백성사를 받아야 한다. 나도 신자의 한 사람으로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며 가장 여러 번 입술에, 그리고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 「하느님이 과연 계실까? 하느님이 계시긴 뭐가 계셔. 계시면 이럴 수는 없을거야」 하는 거였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필 꽃답고 순결한 여학생들과 선량하고 근면한 월급쟁이들이 건너갈 시간에 그 놈의 다리가 무너진 것 하며, 도처에서 연달아 터지는, 순전히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인명살상을 책임질 사람이 나타난 적이 없는 것 하며, 살인마가 감히 사람 위에서 사람을 심판할 듯이 지존을 자처한 것 하며, 세금 떼어먹는 솜씨하며, 못된 짓일수록 많이 하고, 크게 할수록 안 걸리고, 잘 살고, 잘 되는 것 하며, 정말이지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하느님도 손을 뗀 땅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젊은 목숨을 아주 끔찍한 사고로 잃은 유족들 앞에서도 나는 속으로 또 그 생각을 했고, 어떤 문상객은 큰 소리로 나와 똑같은 생각을 입밖에 내서 말했다. 그러나 유족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뇨, 저는 주님이 우리 아이가 고통받을 때 같이 고통받고, 우리 아이가 죽을 때 같이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 적마다 주님은 같이 고통받고 같이 죽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 소리는 어떤 신앙간증보다도 충격적이어서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금년에 업신여기고, 고통을 주고, 무참하게 죽인 것은 귀중한 인명인 동시에 하느님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맞는 말일 것이다. 그 분은 없는 곳 없이 도처에 있는 분이고, 가장 고통받는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곁에는 반드시 같이 있는 분이니까.
우리가 바라는 의로운 세상은 좋은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은 안 되고, 부지런한 사람은 잘 살고, 게으른 사람은 못 살고, 능력있는 사람은 상석에, 무능한 사람은 말석에 앉는 세상이다. 사람이 그렇게 살기를 하느님이 바라시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에잇, 하느님이 있긴 뭐가 있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심보를 뒤집어 보면, 마치 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같은 인간의 또 다른 무책임과 맞닥뜨리게 된다. 만일 하느님이 척척 의인은 높여주고 악인은 벌주어서 이 세상이 걱정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면 그 때도 인간이 존엄할까.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느님이 천상에서 조작하는 키보드대로 움직이는 커서일 뿐 결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인간이 존엄한 것은 뭐가 옳고 그른가라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현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자유의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기도중 하늘의 의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은 그것을 공짜로 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안에서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을 비는 것이다.
주여, 당신을 가장 많이 죽인 해가 저물어갑니다. 당신을 골백번도 더 죽인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새해에도 높고 화려한 제단보다는 어둡고 그늘지고 낮은 데로 임하시어 영광받으소서.<작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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