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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의 그늘(광복 분단50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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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의 그늘(광복 분단50년:17)

입력
1994.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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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빈곤 심화/지역간의 불균형/농촌경제 황폐화/「한강의 기적」이 낳은 검은 유산/분배정의 실현·환경보전등 선진국진입 과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뒤안길에는 고층빌딩의 높이 만큼이나 길고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성장레이스에서 소외된 근로자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 지역 불균형, 환경파괴등은 개발독재의 「필요악」으로 인식되고 있다. 부실공사시비가 끊임없이 있는 것도 고도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내실을 제대로 다지지 못한데 대한 대가다.  71년8월10일 경기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도시재개발 정책으로 서울달동네에서 밀려난 약5만명의 광주단지 주민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양탁식 서울시장(당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양시장은 약속시간 1시간이 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군중들은 『또 속았다』며 격분하기 시작했다. 출장소와 경찰백차가 붉은 화염속에 휩싸였고 7백여명의 기동경찰들이 혼비백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인 이른바 「광주단지사건」이다.

 70년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22세의 젊은 근로자 전태일씨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햇볕을 보게 해달라』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손에 쥔 채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우리나라 현대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전태일분신자살사건」이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벌어진 지난 10월21일. 정부의 정책당담자는 물론이고 기업인이나 일반시민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했던 「한강의 기적」이니 「압축성장」이니 하는 말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박정희군사정권의 「선성장, 후분배」경제성장정책은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데는 확실히 성공했다. 우리나라 민족경제는 광복후 회생의 기미를 찾기 시작했으나 6·25로 완전파괴되고 말았다.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은 지금의 아프리카 르완다를 방불케 했다. 「선성장, 후분배」정책은 우선 파이(국민모두의 몫)를 키워 보자는 것이었고 이는 고도성장정책으로 구체화됐다.

 파이가 커질수록 분배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상대적 빈곤의 깊이는 커져만 갔다. 광주단지사건 전태일분실자살사건은 고도성장에 대한 안티테제 제기의 서곡에 불과하다.급속한 공업화정책에 따른 이농현상과 도시비대화는 필연적으로 빈민밀집거주지역(달동네)을 생성시켰고 도시의 효율적 개발을 위해서는 이같은 빈민밀집지역이 장애요인으로 부각됐다.

 근로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성장이 가속화될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한국경제의 숙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광복직후의 총파업(46년9월, 47년3월)은 성장의 몫을 달라는 요구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운동의 성격이 더 강했다. 반면 전태일사건으로 본격 이슈화되기 시작한 70년대이후의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고도성장에 기여한 근로자자신의 「자기몫찾기」라 할 수 있다. 정부는 대기업에 각종 혜택을 몰아주는식으로 강력한 고도성장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근로자의 임금상승은 철저히 통제·억압하는 정책을 병행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본격추진된 60년대 10년동안 매년 10%선의 고도성장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조업근로자의 실질임금상승률이 연평균 2·4%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인간적 삶에 대한 근로자들의 욕구는 군사독재정권도 원천봉쇄하지 못했다. 근로자들의 집단행동은 주기적으로 발생했고 한 번 터졌다하면 과격한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74년 9월의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 근로자폭동사건, 79년 8월의 YH노조사건, 80년 4월의 강원 사북사태(광산근로자폭동사건)등이 대표적 예이다.

 87년 「6·29선언」은 이같은 자기몫찾기운동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속에서 노조가 우후죽순처럼 결성됐고 노사분규가 봇물터지듯 분출했다. 86년 2백76건에 불과했던 노사분규 건수가  87년에는 3천7백49건으로 늘어났다. 노조수도 87년6월말 2천7백42개에서 그해말에는 4천1백3개로 확대됐다.

 이농에 따른 농촌경제의 피폐화도 고도성장의 그늘진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공업화는 기본적으로 농업의 희생속에서 가능했다. 값싼 노동력은 농촌에서 충당됐다. 농민들의 농산물가격인상요구는 「쇠귀에 경 읽기」와 마찬가지였다. 농민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특히 서울 인천 경기등 수도권으로 몰렸다. 수도권 인구집중도는 60년 20.8%에서 93년 44.7%로 높아졌다. 대신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농가인구비중은 60년 58.3%에서 93년에는 12.3%로 줄어들었다. 농촌에서 아기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성수대교붕괴로 대표되는 각부분의 불실시공이야말로 「빨리빨리정책」(고도성장)에 대한 가장 큰 대가라 할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린 고도성장정책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했으나 도처에서 「부실」을 양산했다. 흔들거리는 한강다리와 땜질공사로 누더기가 된 경부고속도로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도성장의 그늘진 부분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서는 선진국진입이 어렵다는 점에서 계층간·지역간 불균형시정과 환경보전, 부실방지등은 한국경제의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이백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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