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언젠가 연휴라는 것을 깜빡 잊고 먹을 것을 사놓지 않았다가 몇끼를 굶었는데 당시 무슨 「마조히즘적」 흥미를 가지고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을 읽었다가 환장할 뻔 한 적이 있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은 비곗살이 없고 소식하는 편이라 그런지 「끼니」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민감한 편이다. 한끼를 거른다면 말할 것 없고 식사시간이 여느 때보다 조금 늦으면 벌써 머리가 무거워지고 머리와 더불어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그대신 유리한 점은 일단 내 적정량을 먹고 나면 진수성찬이 앞에 있어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내게 자꾸 음식을 권하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가 둘이 함께 무안했던 일도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먹는 습성은 바로 「밥통」의 본질에 따르는 것 같다. 우리 몸 중심에 있는 「밥통」이란 것이 얼마나 참을성 없는 물건인가? 한끼가 아니라면 하루이틀만 걸러보라. 고통은 고사하고 체면, 위신, 자존심이 모두 위태롭게 된다. 그러나 또한편 생각해보면 밥통만큼 정직하고 겸허한 것도 없는 것같다. 「입구」에서는 그래도 맛을 따지고 어쩌고 하지만 「본부」에서는 그런것을 가리는 법이 없다. 밥통은 채워지면 이물질이 들어온 것이 아닌 한 느긋해지고 일정한 양 이상은 거절한다. 우리몸은 그만하면 만족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일단 배가 채워지고 난 후에 무엇을 바라는 것은 탐욕이다.
그런데 사실 먹는 병인 「게걸병」뿐 아니라 다른 탐욕까지도 모두 밥통의 잘못으로 돌리는 수가 많다. 몇억원을 가질 목적으로 살인행위가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빈부의 차를 없애야 한다」는 해결책은 별 설득력이 없다.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도, 부자라고 우월감을 갖는 것도 실은 모두 탐욕이다. 배가 고플 때 환장하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인간은 배가 불러도 그 어딘가가 고파 환장하는 자들이다.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밥통」이 아닌, 우리 몸에 있는 또 하나의 「통」속에 삼시세때 먹는 밥처럼 또다른 「밥」을 매끼 적절한 양으로 꾸준히 부어 넣지 않으면 안된다. 「정신의 양식」을.<조성진 오페라연출가>조성진 오페라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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