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무대수법 등 「신종날치기」 연출/민자 “불상사 없이 목적달성”… 불가피성 극구강조/민주 “총무협상중 기습”… 심야긴급의총 격렬성토 새해예산안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대치는 불과 30초만에 여당의 「상처뿐인 승리」로 결론났다. 국회법개정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를 펴보이겠다고 다짐했던 여야였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날치기와 실력저지라는 구태는 재연됐다.
민자당의 「날치기94」편은 시간이나 무대, 수법등이 모두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민자당소속 국회의장과 부의장의 양동작전, 야당측의 이해되지 않는 허술한 방어등은 예전의 날치기에서도 익히 보아왔던 장면들이다.
민자당측의 거사시간은 정확히 하오8시30분. 하오2시부터 6시간넘게 계속된 대치상태로 본회의장 분위기가 모두 느슨해져 있던 시점이었다. 상황은 본회의장 2층 의장석 오른편의 지방기자석에 이춘구 국회부의장 권해옥수석부총무 송영진의원등 3명의 민자당의원들이 슬며시 모습을 나타내면서 시작됐다.
민주당의 김덕규의원이 이를 처음 발견하곤 『이춘구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수명의 야당의원이 『거기서 뭐해』 『날치기 하는 것 아니냐』고 고함치며 지방기자석쪽으로 튀어나갔다.
이부의장은 기자실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와 본회의장을 내려다 보면서 송의원이 들고있던 무선마이크를 이용해 의사진행사항이 적혀진 쪽지를 읽어내려갔다. 『본회의를 개회합니다. 의사일정 1항에서 47항까지 일괄상정합니다. 심사결과는 유인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상임위에서 심사보고한 대로 의결코자 하는데 이의없으십니까』
여당의석에서 당연히 『없습니다』라는 화답이 나왔다. 일부 야당의원들이 『이의있다』고 외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부의장은 여당측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라고 말한뒤 동행한 두 의원과 함께 총총히 퇴장했다. 소요된 시간은 고작 30여초에 불과했다.
▷본회의장◁
날치기가 진행되고 있는동안 의장실과 부의장실에 포진하고 있던 야당의원들이 속속 본회의장에 달려왔지만 이부의장을 올려다보며 삿대질과 욕설을 던지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상황이 끝나자 본회의장 곳곳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민주당의 김영진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서려던 민자당의 이한동총무의 멱살을 잡고 거세게 항의했다. 이총무는 다른 민자의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김의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김의원은 이총무의 뒤에대고 『야 이 개XX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앞서 민자당은 권수석부총무를 통해 하오6시께 저녁식사를 위해 국회의사당을 빠져나가는 이부의장에게 엘리베이터안에서 이날의 시나리오를 통보하고 협조를 요청했다.이부의장은 저녁식사를 끝낸 뒤 하오8시27분께 의사당 지하1층 후문에서 권수석부총무 송의원을 만나 의사당 3층출입구를 통해 함께 지방기자석에 입장했다.
▷민주장◁
민주당의 분위기는 허탈에서 분노로 점차 격앙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날치기항의, 12·12관련자 기소를 촉구하는 몸짓으로 본회의장에서 밤샘농성을 했다.
예산안의 날치기처리 직후 뒤늦게 본회의장으로 급히 몰려든 의원들은 『이 나라에 법이 있는가』 『날치기하려면 아예 전화로 해라』등의 격한 성토를 벌였다.
의원들은 146호실로 자리를 옮겨 긴급심야의총을 열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의원들은 「백색독재」 「제2의 쿠데타」등 수위높은 말들을 쏟아냈다. 아울러 등원론, 장외론으로 내분을 겪은 지도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도 나왔다.
먼저 신기하총무가 『예산안 추곡수매등의 문제를 놓고 민자당의 이한동총무, 문정수사무총장과 협상을 벌이는 그 순간, 이부의장이 기습적으로 2층에서 날치기를 강행했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이기택대표는 『군사독재자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켰다. 황야의 무법자라도 룰이 있다』면서 『오늘의 만행을 국회쿠데타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원들의 성난 외침이 계속됐다. 『이제 협상은 끝났다. 국회도 더이상 의미가 없다』 『지금 의원직을 사퇴하고 싶은 비통한 심정』 『현 정권이 임기를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분노하는 국민들이 있는데 우리가 참아서는 안된다』 『날치기가 무효화될 때까지 모든 상임위에서 의사진행을 막자』 『우리가 열성을 다했는지, 서로 불신하지 않았는지 반성하자』등의 비판발언들이 쏟아졌다.
▷민자당◁
민자당은 「불상사」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데 대해 일단 만족해하면서 변칙처리의 불가피성을 극구 주장했다. 하지만 당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WTO비준안처리등 향후의 국회운영과 야당의 강경대응으로 인한 정국악화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줄곧 『단독국회는 피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해왔던 이총무는 본회의 산회직후 운영위원장실에서 총무단과 마주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부 부총무들의 야당성토는 극구 제지했다.
박범진대변인은 성명에서 『민주당이 갑자기 국회에 들어와 예산안통과를 방해한 것은 우리당에 날치기통과라는 오명을 씌우기 위한 상투적인 비열한 책략』이라고 비난했다.
이에앞서 하오2시에 일제히 본회의장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던 민자당측은 야당의 실력저지가 현실화하자 하오4시에 의원총회를 열어 본격적인 실력대응에 나섰다. 비공개로 이뤄진 회의에서 총무단은 14개조의 대응반을 편성했다.【이계성·신효섭기자】
◎민주 실수냐태만이냐/“이 부의장 총대” 사전예측 불구 경계느슨/황 의장「근접감시」와 대조… 당내시비소지
이춘구국회부의장은 어떻게 본회의장 2층 지방기자석까지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을까. 민자당이 날치기에 성공한뒤 민주당안팎에서 제기된 의문이다. 민주당은 날치기를 막기 위해 국회의장실 부의장실 본회의장등에 7개의 전담 저지조를 편성, 배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마크 대상은 사회봉을 쥐게 될 의장과 부의장실쪽이었다. 여기에다가 황락주의장은 지난해 예산안 처리때 욕을 본 전력이 있어 이부의장이 총대를 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부의장은 하오6시께 『저녁식사약속이 있다』며 민자당의 권해옥수석부총무와 함께 부의장실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국회밖으로 나갔다. 이 때 부의장실에는 저지를 나선 민주의원들은 한사람도 없었다.
의장실을 맡은 민주당의 조홍규 김옥두의원이 황의장을 끝까지 따라붙어 외부에서 식사를 함께하면서까지 「감시」를 계속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부의장실 담당 민주의원들은 권노갑최고위원과 김태식 나병선 김말룡 문희상 신계륜의원등 이었다. 권최고위원은 『이부의장이 「하오9시까지는 절대로 날치기가 없다. 그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해 평소 신뢰관계를 감안, 외출을 막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이부의장은 권부총무와 자유롭게 작전계획을 짠뒤 마무런 제지없이 지방기자석으로 올라가 맡은바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
단순한 「경계소홀」로 볼 수도 있지만 방조여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경우 당내에서 시비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유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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