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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1∼2회 공개처형 공포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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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1∼2회 공개처형 공포감 조성”

입력
1994.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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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안명철씨 폭로 「회령 수용소」 실태/월남자 가족등 5만여명 수용/“정치범은 씨말려야” 당국방침/김일성사망때 폭동우려 다른명목 분향소 설치/아버지 양곡빼내다 집안 망해 탈출결심 북한의 정치범가족 수용소에서는 김일성사망사실이 알려지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해 분향소를 김형직 탄생 1백돌을 기념하는 것으로 위장했다고 귀순용사 안명철씨는 폭로했다. 다음은 안씨와의 일문일답이다.

 ­회령수용소는 어떤 곳인가.

 『귀순자와 종교인, 6·25전쟁 당시 월남자등 정치범과 가족들이 수용돼 있다. 수용소는 함북 회령시 사울리 낙생리 남성리 굴산리 횡령리 중봉동 일대에 걸쳐 있고 반경이 15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5만여명이 수용돼 있으며 경비원과 관리요원이 1천2백여명에 달한다』

 ­정치범 수용소 실태는.

 『북한에서는 정치범수용소란 말 자체가 없다. 회령정치범수용소가 「22호관리소」로 불리는 것처럼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 수용소들은 정치범들의 탈주를 막기 위해 높이 2·5의 전기철조망을 세워 놓고 있으며 깊이 2·5 폭 2의 함정 안에는 죽창과 못이 솟아 있다. 이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수용소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입대하기 전에는 수용소가 있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아는 정치범수용소는 평남 개천과 함북 화순, 청진시등에 몇개 뿐이다. 또 고위급 인사들은 청진 수성교화소와 함남 요덕 수용소에 많이 갇혀 있는 것으로 들었으나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북한에서 공개처형이 이뤄지고 있나.

 『수용자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탈출을 기도하거나 체제에 불만을 갖고 폭동을 주동하는 사람, 또는 임신한 여인을 대상으로 1년에 1∼2회씩 실시하고 있다. 주로 공터에서 수용자 전원을 모아놓고 손목 다리 가슴등을 말뚝에 묶어 놓은 채 죄명을 알려주고 5명의 사수가 총을 쏜다』

 ­수용소안에서 결혼은 하는가.

 『정치범들은 아예 멸살시켜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방침이다. 보위부 직원들에게 잘 보인 사람 가운데 1년에 1, 2쌍이 결혼할 뿐이다. 이 때문에 탄광 밭 등에서 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다가 임신해 총살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용자의 의복과 주거상태는.

 『옷이 거의 공급되지 않아 수용소에 처음 들어올 때 입고 온 옷을 대대로 물려주고 있어 누더기 차림이다. 신발은 폐타이어나 고무벨트등을 엮어 만든 것이며 돼지나 소가죽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겨울에 동상이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숨지는 사람도 많다. 수용자들의 집은 「하모니카 집」이라고 부르는데 흙과 볏짚을 섞어서 만든다. 겨울에는 난방장치가 없어 자다 얼어 죽는 사람도 상당수다』

 ­수용소의 식생활은 어떤가.

 『1인당 하루에 5백의 강냉이를 공급받도록 돼 있으나 보위부 요원들이 빼돌려 3백밖에 안된다. 굶주림을 못견뎌 뱀 개구리등을 닥치는대로 잡아 먹고 나무껍질 풀등을 먹어 주변 산이 벌거숭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간염 폐렴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별도로 마련된 건물에 격리수용된다. 이같은 질병과 영양부족으로 수용소내에서 50세면 수명이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소식은 들었나.

 『텔레비전을 통해 들었다. 정치범들이 김일성 사망소식을 알지 못하도록 분향소를 김형직 탄생1백돌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위장했다. 정치범들이 알고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 24시간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했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아직도 김일성 사망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탈출동기와 경로는.

 『지난 1월 홍원 양정사업소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양곡을 빼내 주민들에게 나눠준 것이 발각돼 자살하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함경남도 안전국에 수감되는등 먹을 것 때문에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보고 적개심을 느꼈다. 나도 부대내에서 감시대상이 되고 제대후 탄광이나 집단수용소에서 평생 노동할 것이 뻔해 남한으로 탈출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지난 9월 17일밤 트럭을 몰고 두만강까지 가 헤엄쳐 강을 건너 중국으로 숨어들었다』【정덕상·김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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