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구름이 걷힌 뒤 모습을 드러낸 남산의 그 자리에는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외인아파트의 무너짐을 보면서 순간의 파괴예술이 빚어내는 사라짐의 미학에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렸다. 개인의 삶의 자취도 아파트가 순식간에 없어지듯 그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삶과 시대가 지워지지 않게 하려 한다. 윤보선전대통령의 부인 공덕귀여사의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 문학평론가 김병걸씨의 「실패한 인생 실패한 문학」, 전체육부장관 이영호씨(사망)의 「인생은 예행연습 없는 마라톤이야」, 노무현전의원의 「여보 나 좀 도와줘」, 김신조씨의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등 최근 출간된 각계인사들의 자서전도 그런 욕구의 반영이다. 이들의 기록은 자기합리화와 역사왜곡 일색이었던 종전의 정치인자서전과는 다르다. 김병걸씨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리고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 1년가량 유부녀의 정염의 포로가 됐던 총각시절이야기등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 정직한 자서전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은 진실한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덕분이며 남의 고백을 받아 들여줄 만큼 우리 사회의 폭과 품이 넓어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몇달전 독일에서는 에리히 호네커 전동독공산당 서기장(사망)의 회고록 「모아비트 노트」가 화제를 일으켰었다. 그가 베를린의 모아비트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남긴 이 기록에는 동독 붕괴에 속수무책이었던 늙은 독재자의 좌절감과 회한, 자기변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전직 국가원수들은 역사와 국민을 향해 얼마나 정직한 진술을 할 것인가. 특히 『대통령의 재임중 행위에 대한 조사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이유로 국회와 검찰의 조사에 한사코 불응해 온 최규하전대통령은 무엇이든 기록을 하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내년이면 역사와 민족의 큰 분수령인 광복 50년이 된다. 국가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누구든지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 온 사람들은 설령 오욕과 수치로 얼룩진 내용이라 하더라도 후세를 위해 자신의 삶을 증언함직한 시기이다. 아파트가 사라지듯 언젠가 이 지상에서 사라질 우리들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정직한 것을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기획취재부장>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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