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당이 불만스럽기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마찬가지이지만 프랑스국민들은 집권당 뿐 아니라 모든 주요 정당에 실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정치적 과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상당한 믿음이 있고 정부 자체에 대한 신뢰도 꾸준하다. 지난 8일 중간선거에서 정부를 비난한 사람들이 당선됐던 미국과는 다르다. 통치하지 않는 정부가 최상의 정부라는 견해는 지난 20년간 영국의 대처리즘을 표방해 온 것이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마거릿 대처전총리와 그 뒤를 이은 존 메이저현총리 정부는 전후 영국 노동당이 복지국가를 건설한 이래 가장 적극적이고 급진적이다.
대대적인 민영화 작업은 메이저 정부의 인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으며 그 바람에 이념적 정화를 거친 현대화한 노동당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선거는 오는 97년에나 있다.
이에 반해 프랑스 선거는 눈 앞에 다가왔다. 대통령 선거는 내년 4월 23일 치러진다.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의 건강이 아주 나쁘기 때문에 더 당겨질 수도 있다. 미테랑의 사회당은 1년 반 전 총선에서 참패를 경험했다. 현재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보수 우파 연합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길 것으로 예상돼 왔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보수주의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자크 시라크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것이다. 얼마전까지 대중적이고 능력있는 파리시장이었던 시라크이지만 꺾일 줄 모르는 정치적 야심 때문에 지난 두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내년 봄 선거에서도 그가 만든 신드골주의 정당인 공화국연합(RPR)은 질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럼에도 지칠 줄 모르는 시라크는 또 한번의 패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라크는 인기가 있지만 대통령감으로서는 별로다.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고도의 판단력과 진지함이 없다.
그는 배신을 통해 출세했다. 지난 74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골주의 지도자인 샤방 델마를 저버리고 중도파인 지스카르 데스탱을 밀었다. 데스탱은 집권 후 시라크를 총리에 임명했지만 곧 후회했다. 2년 뒤 데스탱을 배신한 시라크는 데스탱에 맞서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가 1차투표에서 졌다. 그러자 시라크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데스탱에 투표하는 것을 방해했고 결국 미테랑이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시라크는 지난 86년 총선에서 우파가 승리하자 다시 총리가 됐으나 형편없는 직무수행으로 88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에두아르 발라뒤르총리가 오히려 다음 대통령감으로 시라크보다 더 지지를 얻고 있다. 드골주의자가 아닌 우파들도 출마할 태세다.
이같은 우파 내부의 분열로 가장 수혜를 받는 사람은 내년 1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직을 물러나는 자크 들로르다. 그는 가톨릭교도이고 노조에 뿌리를 둔 사회주의자로 그동안 한번도 프랑스 정치의 첫번째 서열에 오른 적이 없다. 또 선거 운동에 서투르며 추종자 조직이나 전투원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맡아본 선출직 공무라고는 유럽의회 의원과 파리 교외의 소도시 시장직 뿐이다. 좌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타락하고 불신받는 프랑스 좌파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이 그를 좋아하고 믿는다는 점이다. 프랑스인들은 국민의 돈으로 스위스 은행의 개인 계좌를 불린 정치인들의 부패에 화를 내고 있다. 발라뒤르 현정부의 각료 2명도 사회당 고위관리들에 이어 부패혐의로 물러났다.
들로르는 때묻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지난 84년부터 프랑스가 아닌 EU의 브뤼셀 본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각종 스캔들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국내정치에 닳고 찢기는 것을 면했다. 그가 출마를 선언한다면 우파의 분열이 없더라도 프랑스의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아주 높다. 정치적 이익 배당을 노린다면 들로르에게 걸 만하다.【정리=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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