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대통령 지시로 서둘러 착공/「성산보호」 여론에 92년 철거결정 22년간 남산을 가로막았던 남산외인아파트는 우리의 도시계획이 얼마나 무원칙하게 진행돼왔는가를 증명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지난 69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해방이후 공원부지로 지정됐던 용산구 한남동 일대 남산에 외국인들을 위한 아파트및 각국의 공관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본래의 도시계획과 남산보전의 꿈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이후 한남동쪽에 1만7천평의 남산외인아파트와 1만3천평의 단독주택이 주공에 의해 건설돼 72년 완공됐다. 그후 이 주거지역은 외국인들에게 분양돼 올 6월 퇴거가 끝날때까지 임대형식으로 주공에 의해 운영돼왔다. 그러나 92년 민족의 성산인 남산을 보호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서울시는 남산제모습갖기운동을 펼치고 남산의 흉물로 지적된 외인아파트를 철거키로 결정했다.
시는 건설설계전문업체에 용역을 주어 남산제모습가꾸기 기본계획을 수립, 이 지역에 식물원등을 짓기로 확정했으며 1백90억원의 예산을 배정해 이 일대에 대한 매입에 들어갔다. 토지매입과 외국인들에 대한 퇴거는 올 6월에야 이뤄졌다.
서울시는 이어 구체적인 폭파계획을 세우고 지난 9월 시공업체로 코오롱건설과 미CDI사를 선정한 뒤 아파트의 창벽과 기타부착물을 뜯어내는 사전작업에 들어갔다.
시는 당초 폭파일을 서울시민의 날인 10월29일로 정했으나 성수대교붕괴사고로 날짜를 연기해 교통과 주민통제가 비교적 수월한 이달 20일을 D데이로 잡게 됐다.【이영섭기자】
◎남산 수난사/산자락마다 외침·개발의 상처/임진란때 왜군주둔 첫수모/일제 신사건립 정기더럽혀
남산외인아파트가 폭파철거되면서 긴세월 콘크리트벽에 가려졌던 남산의 본래 모습이 시민들에게 되돌아왔다. 남산은 수난의 사슬을 또하나 벗었다.
1394년 한양정도이래 6백년간 우리민족의 만고풍상을 말없이 지켜보아온 남산은 수도의 상징이자 민족의 성산으로 우리가슴에 새겨져왔다. 남산은 정도직후 봄과 가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무학대사를 모셨던 장소인 국사당이 건립돼 성산으로 자리잡았다.
민족의 정기와 기상이 서린 남산은 파란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외세의 침해와 개발의 삽질에 크게 훼손당해왔다. 이번 외인아파트철거로 남산은 상당부분의 모습이 되살아나 산의 정기를 되찾는 큰 계기를 맞게 됐다.
남산은 근대사의 격동기에 찢긴 수난의 현장이자 무분별한 개발에 상처입은 희생물의 상징이었다.
임진왜란당시 남산에는 침략군의 주둔지가 세워졌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때에는 일본의 신식군대가 진주해 산의 정기를 더럽혔다. 또 일제점령기에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등 침략의 주역들이 산중턱에 정자와 집등을 짓고 국사당을 헐어 경성신사를 짓는등 민족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광복이후엔 남산을 자연상태의 공원으로 조성하려했으나 개발과 공익이라는 이름아래 굴이 뚫리고 외국인주택단지, 호텔, 군과 기관의 건물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당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남산의 시름은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나 이제는 남산을 포위하고 상처냈던 문제의 장애물들이 하나 둘 제거돼 금세기안에는 옛날 남산의 본모습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됐다. 재탄생을 위한 외인아파트폭파로 시작된 남산복원사업은 남아있는 남산맨션아파트, 안기부건물등이 마저 이전되면서 본격화된다.【고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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