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후 눈덩이 유입… 한때 망국론까지/경제커지며 수렁탈출… 이젠 개도국 지원 “떳떳”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경제에 「외채망국론」의 강풍이 거세게 몰아쳤다. 타임지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요 외채대국을 소개하면서 한국을 4위로 꼽아 단골손님으로 등장시켰다. 어느 순간에라도 불시에 「주식회사 한국」이라는 기업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지갑은 비고 빚만 늘어 하루를 꾸리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대규모 외채탓으로 상환능력에 문제가 생겨 금방이라도 도산할듯한 분위기가 수년간 지속됐다. 당시 외국자금을 마른 논에 물대듯 허겁지겁 조달하던 실무공무원들은 『돈을 빌려줄 곳을 찾느라 하루하루가 마치 10년이라도 되는듯 느껴지던 때였다』고 고개를 가로 흔들며 회상한다. 외채망국론은 정부수립이후의 우리경제가 50년대의 짧은「원조시대」를 지나 제2기로 맞게 된 「외채시대」의 막판상황이었다. 해방이후 빈털터리로 출발한 정부는 특히 6·25직후 외국으로부터 무상원조를 잠시 받다가 곧바로 미국과 국제연합(UN)의 공여성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조는 당장 생계를 유지하는 주요수단이었다.
50년대말까지 이렇게 들어온 원조금액이 24억7천만달러에 이른다. 이중 미국이 77%를 지원했고 나머지 23%를 UN이 냈다. 많이 들어온 57년의 경우 연간 3억8천만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미국의 공법 480조(PL480)에 의한 잉여농산물 수입자금이나 UN의 한국재건단(UNKRA) 자금등이 이러한 원조로서 직접적인 생계외에도 충주비료공장등 기간산업시설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외채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UN의 공여성자금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자 각종 국제금융기구나 은행등을 찾아 다니며 적극적으로 빚을 끌어다 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유입속도가 늦어 60년대의 10년간 모두 18억달러가 들어오는데 그쳤다. 돈이 궁한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7억2천만달러규모의 대일청구권 자금을 끌어다 쓰기도 했다. 이 자금이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포항제철등을 건설하는데 투입됐다.
외채는 73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급격히 증가, 76년 1백억달러를 넘어섬으로써 우리경제의 주요 현안으로 등장했다. 당시 국민총생산(GNP)과 비교하면 36.7%였다. 불과 3년뒤에는 2백억달러를 돌파했고 뒤이어 2년뒤에는 3백억달러, 또 2년뒤에는 4백억달러를 각각 넘어서는 「급템포 팽창」을 계속했다.
정치적 불안정이 심했던 80년 경우엔 1년 사이에 70억달러가 급증하기도 했다. 우리경제를 삼켜버릴듯한 태세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외채는 또 2년뒤에는 5백억달러를 넘어설 기세였다. 85년말엔 외채총액이 4백67억6천만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GNP의 51·3%에 달하는 위기적 상황이었다.
벼랑의 위기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때마침 불어닥친 국제적인 3저의 호황을 타고 만성적자상태의 국제수지가 86년부터 대규모 흑자로 돌아서는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까지 오로지 팽창일변도이던 외채규모는 이때부터 「축소」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86∼89년의 4년간 흑자규모는 3백36억8천만달러를 기록했다. 이가운데 일부가 외채를 갚는데 이용돼 89년말 외채는 2백93억7천만달러로 급감했다. 특히 외채에서 대외자산을 뺀 순외채는 89년에 30억달러로까지 줄어 국제수지 흑자가 1∼2년만 지속됐어도 만성적 채무국이 「채권국」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흑자는 「4년천하」로 끝났다. 내리막길 외채는 다시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외채위기는 생소한 말이 돼버렸다. 아울러 4년간의 흑자시기에 정부는 해외원조에 나서기 시작했다. 87년부터 경제개발협력기금(EDCF)을 조성, 개도국에 원조성차관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에 기금은 3백8억원을 조성했다. 사업승인을 기준으로 첫해엔 1백79억원이 투입돼 나이지리아에 철도차량을 제공했고 인도네시아엔 도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해마다 기금의 규모가 늘어 올10월까지는 5천43억원을 조성했고 세계 21개 국가에 3천3백98억원을 지원했다. 이 자금은 마치 우리가 과거에 원조자금으로 상·하수도를 놓고 학교를 짓는가 하면 도로를 개설했듯이 우리보다 뒤진 개도국에서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95년에 세계은행(IBRD)의 차관공여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을 끝으로 국제적인 공적 개발기구의 차관수혜국에서 졸업한다. 명실상부하게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하는 것이다. 분단 50년을 맞는 시점에서 원조로 연명하고 외채에 시달리던 거대채무국이 원조국으로 바뀌어 또 다른 출발을 하고 있다. 아직은 우리가 과거에 받은 것에 비해 원조규모가 미미하다. 그러나 지금의 기조가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과거의 원조수혜규모 이상으로 해외의 개도국을 지원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선 건실한 성장의 지속이라는 전제가 더할나위없이 중요하다.【홍선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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