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대항 “뒤늦은 도박”/가전기기·패션·차등 「매혹적 제품」개발 혼신 『하이테크의 시대는 가고 하이터치의 시대가 도래했다!』 유럽의 기업들은 디자인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강조되면서 이제 제품의 기술적 가치를 우선하는 하이테크보다는 제품의 미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간주하는 하이터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디자인은 제품을 치장하는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됐지만 이제는 디자인이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믿음이다. 실제 디자인이 수요를 창출하고 제품 자체의 혁신을 촉발하며 시장의 판도를 일시에 뒤바꾸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유럽의 기업들이 디자인 파워를 키우는데 기울이는 노력을 소개한다.【편집자주】
파리에 본부를 둔 가전제품회사 톰슨은 최근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기술보다 디자인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극비리에 컬러TV세트의 디자인을 혁신하는 작업에 들어 갔다. 이 TV세트 기능은 기존의 제품과 큰 차이가 없지만 디자인에선 기존의 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제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톰슨사의 이같은 결정은 도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제품 디자인을 맡은 프랑스의 저명한 디자이너 필립 스타크는 『이제 소비자들은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제품이 개발돼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첨단기술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이다. 대신 그들은 좀더 따뜻하고 친밀감있고 매혹적인 제품을 원한다』고 말한다.
70년대까지 디자인에서 우위를 점했던 유럽의 기업들은 80년대 들어 디자인보다는 제품의 성능과 기술력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같은 기간 창조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은 일본과 미국의 회사들에게 시장의 상당부분을 잠식당하는 실패를 맛보았다. 이제 시행착오를 깨달은 유럽기업들이 대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92년 파리 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인 프랑스 르노사의 새 모델 트윙고의 성공은 유럽차가 디자인에서 대반격을 시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트윙고는 유럽 디자인의 잠재력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꼽힌다. 미니카인 트윙고는 소형차와 봉고를 혼합한 독특한 형태로 디자인됐다. 앞창의 밑부분을 앞으로 끌어당겨 실내 공간을 넓히고 반원형의 헤드램프를 부착해 앞에서 보면 마치 차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트윙고의 디자인은 가장 프랑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트윙고는 벌써 20만대가 팔리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트윙고의 성공은 위험을 무릅쓴 도박의 결과였다. 르노사의 최고 경영진은 트윙고를 출시하기 전에 실시한 시장조사에서 고객의 40%가 새 차의 파격적인 디자인에 대해 『품위가 없고 장난감 같다』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자 생산계획의 폐지를 검토했다. 그러나 회사의 디자인 책임자인 파트릭 르 케망이 『10%의 소비자가 새 차의 디자인에 매료돼 있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우겨 빛을 보게 됐다.
디자인이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부상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소비패턴의 변화를 꼽는다. 50∼60년대의 경제번영은 대량소비를 낳았다. 풍요로움에 젖은 이 시대의 소비자들은 앞다투어 냉장고 컬러TV 비디오레코더를 구입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냉담하다. 경기침체로 인한 가계비 부담과 환경보호의 영향으로 불필요한 소비를 악덕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까다로운 소비자의 눈길과 마음을 잡아당기는 창조적이고 매력적인 상품을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장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디자인 책임자인 스테파노 마르자노씨는 『80년대까지는 신기술이 시장을 지배했지만 이제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소비자들은 효율과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제품을 원한다』며 『이런 이유때문에 디자인의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이제 제품개발이나 생산 광고등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핵심요소가 됐기 때문에 미적 감각에만 의존하는 디자인은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덴마크 국립디자인센터의 컨설턴트인 비르기타 카페틸리오씨는 『현대의 디자인은 컴퓨터그래픽등 첨단디자인 기법과 마케팅전략 제조원가산출등 복합적 요소를 총괄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며 『미적 감각이나 재능보다는 지성이나 마케팅감각이 미래 디자이너의 자질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한다.【로마=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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