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으로 가꾼 신비한 언어의 숲 조정권의 「신성한 숲」(「현대시학」11월)연작은 신비한 분위기에 싸여있다. 저녁나절 산마을을 골안개가 휘감듯이 이 신비한 분위기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영롱한 언어들을 온통 감싸고 있다. 이 신비한 분위기의 휘장을 걷고 안으로 한발 다가서면 신비함은 바로 도저한 사색의 결과 얻어진 지혜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 이 지혜는 구도와 닿아 있다.
구도를 종교적인 사항과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시인의 경우 구도는 시를 쓰는 일 자체일 수 있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색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조정권의 시에 나타나 있는 구도는 삶에 대한 사색이고, 사색의 텃밭에서 수확하는 지혜의 열매를 탐하는 집착이다. 이 집착은 매우 강하고 끈질기다. 집착이 강한만큼 언어에 대한 시인의 지나칠만치 섬세한 배려는 시 전체를 언어의 황홀한 숲으로 만들고 있다.
<빛을 경멸하는자 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빛을 저버린자 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빛을 저주한자 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빛을 가린자 들어오지 못하리라 다만 고통받는자 이 문을 지나리라> (「신성한 숲2」). 이런 구절은 조정권이 사색의 텃밭에서 지혜의 열매를 수확하는 시적 표현의 하나다. 세심하게 가려뽑은 언어들이 얼마나 황홀한 숲을 이루고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시인의 구도가 지혜의 열매를 얻고, 시인이 절차탁마하여 영롱한 언어의 숲을 시로 조성하는 흔하지 않은 예를 「신성한 숲」의 연작에서 확인하게 된다. 빛을 경멸하는자 들어오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현대시학」 (11월)에 발표된 이 3편의 연작은 너무 신비의 안개에 싸여있다. 이 안개는 읽는 사람을 언어의 숲 속에서 방황하게 만든다. 방황은 시인이 수확하는 열매의 맛을 놓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때 「시인」만의 깨달음은 「우리」의 지혜와 슬기로 재생산되지 못하고 만다. 신비의 안개를 걷어낼 때 시인만의 깨달음은 우리 모두의 지혜와 슬기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정신주의의 극단 혹은 명상의 깊은 계곡에서 빠져나와 황홀한 언어의 숲에 확실한 오솔길을 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언어의 절약과 시 전체 구성의 압축이 사려깊게 행해질 때 오솔길은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현대문학」(11월)에 발표한 「지상의 바구니」와 「동참하세요」에서 조정권의 시는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내게는 의미깊은 저녁이 가라앉아 음악을 이룰 때가 있다 과일 속에 단맛을 들여놓듯 마음의 시원인 어둠이 무게를 내리 듯 나는 과일의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지상의 바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주의 신비를 안아들이려는 깨달음이 이들 구절에는 내밀하게 박혀 있다. 「신성한 숲」의 연작에서 신비로운 분위기의 안개가 「지상의 바구니」에서 걷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분명 조정권은 명상의 시인이다. 오래 전부터 내게는 의미깊은 저녁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