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국가중 독일은(일본도 유사한 경우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늦게 근대국가 형성에 성공하였다. 남이 장기간에 걸쳐 이룩한 것을 관료층이 중심이 되어 단기간내에 성취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고 이것은 나름대로의 무리와 부작용이 따랐었다. 무엇보다도 민주화가 조직적으로 억제되었고 대외적 공격적 자세가 배양되었다. 이것들을 해소하는 데에는 나치 전체주의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리의 경우를 독일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겠지만 후발 선진국으로 국가―관료층이 그 중심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독일의 경우는 우리 문제와 관련지어 여러 모로 생각케 하는 점이 많다. 우선 국가중심적 발전이 민주화의 지연을 대가로 했다는 점이 흥미있는 유사성으로 부각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민주화를 위한 개혁으로 그치지 않고 국제경쟁력 제고의 과제로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의 각성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행정조직의 분발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무원은「복지불동」이란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일에 치여있는 표정을 짓는데 조직으로서의 관료층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니 이상한 일이다. 당사자인 공무원들의 얘기로는 개혁작업이 비리의 구조적 요인의 제거보다는 개인 위주의 처벌만을 강조하여 사기가 저하된 까닭에 「복지부동」이 결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그동안 지속된 사정이 주로 정치인들을 상대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큰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최근의 대형사고를 보면 공무원의 「복지부동」이 사정작업과 관련되는 것도 아닌 듯 싶다.
따라서 「복지부동」은 공무원들의 심리상태가 아닌 다른 각도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조직으로서의 관료층이 변화된 정치환경과 새로운 과제의 성격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행정조직은 권위주의에 의해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자발적 창의적인 문제설정·해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복잡한 현대사회의 과제를 처리할 만큼 전문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잘났든 못났든 간에 행정관료야말로 개혁과 경쟁력 제고라는 이중과제의 효과적 추진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조직화된 수단이라는 점이다. 개혁의 과제가 아무리 긴급해도 「복지부동」의 행정조직으로는 일이 안된다. 따라서 행정조직의 근본적 혁신은 우리 사회의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생각되는 혁신의 내용은 고시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충원제도를 바꾸어 전문인력의 조직적 대량적 흡수가 가능토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행정조직의 상부층이 누리는 권력원의 타파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단히 어렵겠지만 바로 우리나라의 관료조직이 행사하는 독특한 권력구조를 바꾸지 않고서 행정조직은 정치가 의도하는대로 움직여지는 조직이 될 수 없음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문인력이 공무원 신분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능력에 비례하는 처우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처우개선의 문제는 공무원사회의 고질적 문제의 하나인 부패척결을 위한 전제가 됨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현재와 같은 부처할거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결정구조의 타파가 필요하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과제들 중 어떤 것도 특정 부처의 고유업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구조가 온존하는한 결정은 지연되거나 관료조직내 기득권구조를 반영하는 흉한 꼴의 결정이 내려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대북협상의 문제를 보자. 그러지 않아도 말이 많았던 조정문제는 경협문제가 추가되어 한몫을 챙기겠다는 부처가 늘어나면서 더 복잡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정부의 역할에 관련된 새로운 개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기존의 관념대로라면 정부가 사회의 모든 업무를 관장해야 하겠지만 이러다 보면 행정조직의 규모는 사회조직과 과제의 성장·증가에 따라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념적, 재정적, 기술적으로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왕에 정부가 맡던 일 가운데 수익자부담을 원칙으로 시장기능에 맡길 수 있는 일들은 과감히 민간조직에 위임하고 정부는 감시와 심판관 기능에만 전념할 필요가 있다. 개혁과 경쟁력 제고의 성공 여부가 행정조직의 활성화 여부에 크게 달려 있음을 생각할 때 공무원의 「복지부동」자세는 모두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임에 분명하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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