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은 개발독재체제에서 「조국근대화」라는 일종의 상징조작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나라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선진국들이 걸린 과정을 단축하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수대교의 붕괴는 그러한 상징조작의 실상을 드러내면서 시간이라는 엄정한 잣대에 우리가 고배를 들었음을 웅변해 준다. 샴페인잔은 역시 너무 일찍 치켜든 거다.
속도주의 성과주의 전시주의라는 온갖 비난이, 끊어진 다리 위에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다리를 비난할 것이 아니다. 다리는 인간들의 허위를 모르는 채 정직했을 뿐이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다리는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좀처럼 서울의 강남에 갈 기회가 없는 기자는 지난 주말에 올림픽도로를 달리면서 그 다리를 목격했다. 그 충격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화면과는 강도가 달랐다. 전쟁·첩보영화에서나 본 끊어진 다리에는 모든 것이 집약돼 있었다. 강남개발의 졸속성, 교통량 측정의 원시성, 대중교통수단의 부족…. 온 세상이 떠들썩한 시공과 관리의 잘못 말고도 모든 허망한 것들이 있었다. 기자는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터득해야 할 어떤 「정신」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어느 철인은 오래전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고 했다. 그 말이 여기에 적합한지는 모른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물신숭배자가 됐다. 『아파트는 몇 평이냐』 『자동차는 몇㏄냐』 『그 나라의 국민소득은 몇 달러냐』『성장률은 몇%냐』 『금메달은 몇개나 땄느냐』등등…. 생 텍쥐페리가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어린 왕자」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숫자화·계량화하는 습관에 길들여진 것이다. 계량화는 가장 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비합리적이다.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향하고 있다는 우주속에 사는 우리의 삶에는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어떤 정신의 질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리 용접의 오류도 그러한 정신의 결핍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복원할 것은 성수대교의 물질적 복원을 넘어서는 이 사회의 총체적 정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하다. 우리는 도서관을 허물고 쇼핑센터를 지은 멘탈리티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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