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정치외교사학회-동북아문화연 공동개최―내일 세종호텔서 1894년(갑오년)은 우리 근대사에서 일찍이 찾기 힘든 역사적 사건이 휘몰아친 개혁의 여명기이자 외세의 침략의 촉수가 밀어닥친 민족 수난의 출발점이었다. 조선왕조 말기 관리의 폭정과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혁의 선각자 김옥균의 암살, 동학농민운동 와중에 일어난 조선 선점을 위한 청일전쟁, 근대적 제도개혁안을 마련한 갑오개혁 등 우리민족사 전개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해였다.
한국일보사가 정치외교사학회, 동북아문화연구원과 공동으로 8일 세종호텔에서 개최하는 「김옥균암살·갑오개혁·청일전쟁 1백주년 학술대회」에서는 1세기전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내외에서 숨가쁘게 전개됐던 세가지 사건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찾는 의미깊은 자리이다.
학술대회의 주제와 발표자는 ▲조선의 위기(문희수·서원대) ▲갑오개혁의 정치사 조명(김용욱·원광대) ▲갑오내정개혁에 관한 재평가(신국주·동국대) ▲갑오개혁을 통해본 개혁과 보수의 이념갈등(이재석·인천대) ▲갑오개혁의 민족주의적 평가에 기초한 「한말 민족주의 전체상」에 대한 재검토(김혜승·이화여대강사) ▲김옥균의 죽음과 국내정치(이달순·수원대) ▲김옥균의 암살과 한·청·일 삼국(김영작·동북아문화연구원원장)등 7편이다.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김옥균암살배후등을 파헤쳐 관심을 끌고 있는 김영작원장의 논문과 갑오개혁과정에서 나타났던 개혁과 보수의 이념갈등을 다룬 이재석교수의 논문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주】
◎“김옥균암살 일 방조·은폐”/김영작원장 「김옥균 암살사건과 한청일3국」요약/“외교적부담·장래위험성 피하려 개입/기존 청·조·민씨 관련설은 모두 잘못”
김옥균암살은 주범홍종우등이 조선정부에 아부하여 입신출세할 목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다. 청국이나 조선정부, 민씨척족과 관련됐다는등의 기존의 주장은 잘못됐다.
조선정부는 사건직전 공범인 이일식 권동수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린 상태인데 그들에게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지시할 리가 없고, 실제로 사건 전모도 일본으로부터 통보받았을 뿐이다. 이일식 권동수등은 박영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조선정부가 체포령을 내렸었다.
민영익의 지시를 받고 암살했다는 주장도 민영익이 그로부터 범행계획을 듣고난 직후 일본정부에 폭로한 사실로 보아 설득력이 없다.
한편 김옥균이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가게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청국정부관련을 주장하는 것도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청국정부가 김옥균을 국내외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초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억류나 조선송환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암살에 가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김옥균이 대청·대한외교에 부담스러운 존재이고 조선정략에도 방해가 되는 것으로 판단한 일본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암살계획을 사전에 알고도 방조했다. 일본이 암살계획에 깊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일인공범인 오오미와(대삼륜)를 일본정부가 은닉하려 한 사실이 잘 말해준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않은 오오미와는 이일식이 작성한 「김옥균등 갑신역적 몰살계획」이란 서류에도 명단이 올라있으며, 홍종우에게 암살자금을 제공했던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범인명단을 입수한 시점부터 김옥균암살사건공판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오오미와를 수사나 심문한 적이 없고, 재판과정에서 증인이 그 이름을 언급하려 할 때도 「사항 외의 일」로 규정하여 입을 막았다.
일본은 이처럼 암살을 방조·은폐함으로써 김옥균의 일본체재로 인한 외교적 부담과 제3국체재로 인한 장래의 위험성을 동시에 없애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었다.【정리=최진환기자】
◎개혁수구파동학군 자주국가실현 초기엔 이견 점차 근대화공감/이재석교수의 「갑오개혁을 통해 본 개혁과 보수의 이념갈등」
갑오개혁은 전근대적인 가산관료제적 체제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편한 근본적인 제도개혁이다.
개화파 인물들이 일본의 세력을 업고 단행한 이 개혁은 조선조 정치사상사에서 이어져 온 개혁론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조의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수신론과 제도론에 입각한 개혁론으로 나뉘어지는데, 갑오개혁은 제도론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분제의 철폐, 재정체계의 일원화등을 도입한 갑오개혁은 보수이념과 갈등을 보였다. 개혁파, 수구적 지식인, 동학농민군의 개혁이념이 모두 독립된 주체적 국가를 확립·발전시키는 것이었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구파들은 일본에 의존하는 개혁파를 적으로 간주해 처단을 요구했다. 또 근대화를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동학과 개화파도 민족보전을 앞세워 외세일본을 배척한 논리와 대일의존의 논리가 갈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혁과 보수이념이 갈등을 보인 개혁파, 수구파, 동학군은 점차 그들 사이에 근대지향성이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 갈등은 극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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