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요정·티켓다방까지 성업/“창문여니 파리가…” 부작용 한탄/「돈맛」알곤 순박한 인정 옛말, 한국인은 「봉」 두만강은 여전히 단절의 강으로 남아 있으나 강역의 조선족사회는 오랜 폐쇄의 장벽을 허물고 외부로 열려 있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 익숙지 않은 개방은 혼란스러운 법이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X파리가 들어온다』 연변의 조선족이 급격한 개방의 부작용을 한탄하는 얘기다. 연변의 외양은 자본주의의 값싼 상업문화가 시골접대부의 천박한 화장처럼 덧칠돼 있는 느낌을 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의 밤풍경은 비록 규모는 작고 시설은 어설퍼도 갖출 것은 다 갖춘 한국 도시의 축소판이다. 나이트클럽에 룸 살롱, 안마실을 갖춘 사우나에다 티켓다방, 서태지노래가 흘러나오는 노래방까지 우리가 아는 유흥업종의 거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연길시내에만 야총회(나이트클럽) 간판을 건 곳이 1백여개에, 노래방과 술집이 7백여개. 간판을 내걸지 않는 비밀요정까지 합하면 무려 1천2백여개의 유흥업소가 어딜 가든 차로 10분이내인 이 좁은 도시에 들어 차 있다. 인구대비로 중국최고의 소비유흥도시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올해초부터 이런 불명예를 씻기 위해 시당국은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더욱 음성화하거나 인근 용정, 혼춘등지로 확산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유흥업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개방으로 돈맛을 알게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는 모두 뒤편으로 물러앉았다. 조선족사회에서 나름대로 명망있는 사람들이나 교사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이런 장사에 나서는가 하면 명함에 꽤 품위있는 직함이 새겨진 이들도 기를 쓰고 한국행 배를 탄다. 괜찮은 직장의 봉급이 우리 돈으로 월5만원 정도니 서울서 한 1년만 식당종업원으로 불법취업하면 그야말로 「집안을 일으키는」 부를 움켜쥘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은 흔히 『왜 같은 동포가 방문하겠다는데 한국정부가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개방초기 한국인들이 감격해했던 순박한 인심도 느끼기가 힘들어졌다. 옷차림이나 말씨로 남조선사람인 것을 안 순간부터 시쳇말로 「봉」이 된다. 숙박비나 항공, 기차요금등 중국정부가 외국인에 씌우는 최고 3∼4배씩의 공식바가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택시요금, 음식값, 시장물건값, 안내비등 온갖 곳에서 챙기려 드는 일이 많다. 연변의 조선족사회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 바꾸어 놓은 주범이 한국인 자신들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연변에 돈이 구르기 시작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치풍조도 두드러졌다. 백산호텔을 중심으로 한 도심지역 일부만 간신히 포장돼 있을 뿐 온통 좁고 울퉁불퉁한데도 길마다 차량홍수를 이루고 있다. 출퇴근시간에는 온 도시가 서울의 러시아워를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을 앓는다.
연길에서 볼 수 있는 차량은 중고가 많긴 하지만 독일제 벤츠, BMW, 일제 도요타 렉서스, 미제 링컨, 캐딜락등 세계의 명차가 흔하다. 뉴그랜저, 포텐샤, 로얄살롱서부터 르망, 엑셀에 이르기까지 한국산 차종도 거의 모두가 망라돼 있다.
대개 북한을 통해 밀수된 이런 차들은 판매가가 국내가의 두배 이상이다. 중국인들의 수입수준으로는 소유 자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소유주는 개방이후 떼돈을 번 연변의 개체호(개인사업가)들이다.
행세하는 티를 내고 싶으면 핸드폰 정도는 여기서도 필수품이다. 호텔로비 낡은 소파에 앉은 젊은이들은 핸드폰으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죽인다.
연변의 조선족은 아직 면역력을 갖지 못한채 개방증상을 앓고 있다. 현재의 진통이 백신으로 작용할지 중증 질병으로 발전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동족일체감 보여도 “우리 중국선…” 한계의식
12억 중국인중 7천만 정도가 한족외의 소수민족이다. 56개의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2백10만여명으로 12번째지만 교육수준, 민족의식은 가장 높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중국에는 신강유오량등 5개의 소수민족 자치구와 연변등 30개의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다. 연변은 52년 9월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에 의해 자치구로 지정됐다가 55년 중국 신헌법규정에 의해 자치주로 격하됐다. 인구와 면적이 성급에 미달한 것이 격하의 이유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5∼6개의 조선족 자치향이 있다.
조선족의 밀집거주지역인 동북3성의 도시별 조선족인구는 용정이 18만3천명으로 가장 많고 연길시(17만7천) 길림성 길림시(16만6천) 화룡현(13만6천) 혼춘시(9만2천) 왕청현(8만5천) 요녕성 심양시(8만3천) 도문시(6만9천) 안도현(5만1천)등의 순이다. 1870년대부터 집단이주를 시작한 이민 1세대는 광복 전후에 연변으로 몰려들었으나 50년대이후 농사등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흑룡강, 길림, 요녕성으로 빠져나갔다. 60년대 들어 고급교육을 받은 조선족청년들이 여러 곳에 배치되면서 거주지역은 다시 확대됐다.
조선족은 중국 특유의 소수민족정책 덕분에 언어와 풍습을 아직도 유지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접근은 적당한 수준에서 제한받고 있다. 91년에 세워졌다가 당국에 의해 파괴된 용정의 선구자탑사건이 단적인 예다. 특히 92년 한중수교이후 조선족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과 중국인이라는 국가의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인들을 대할 때면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보이지만 『우리 중국에서는…』이라는 말이 곧 이어진다. 조국에 대한 향수나 실향의 아픔은 이제 고인이 됐거나 노인인 이주 1, 2세대의 몫이다.
◇특별취재반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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