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역정·활동상 편견없이 담아 미서 출간 『20세기 신문과 방송에서 「가십」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걸출한 언론인, 그러나 그는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의 선봉에서 미국 국민을 호도한 기회주의자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아 온 미국 언론인 월터 윈첼(1897∼1972년)의 전기 「윈첼―가십, 권력 그리고 명사의 문화」(알프레드 크노프간)가 출간됐다. 전기작가 닐 가블러가 쓴 「윈첼…」은 칼럼니스트인 동시에 뉴스 캐스터로서 20세기 중반 40여년 동안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윈첼의 인생역정을 재조명하고 있다.
닐 가블러는 『윈첼을 이해하지 못한 역사가는 20세기를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치켜세우는 찬양론자의 관점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책의 진면목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윈첼의 삶을 편견없이 차분하게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각에 있다.
1897년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윈첼은 서른살이 될 때까지 언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유명 연예인을 꿈꾼 그는 13세의 어린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훗날 첫 부인이 된 매혹적인 여가수 리타 그린을 만나 본격적인 연예활동을 시작했고 연예계 유명인사와 교분을 쌓으면서 유머러스하면서도 격조높은 화술을 익혀나갔다.
어느덧 극장 게시판에 나붙는 그의 재기 넘치는 광고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그의 광고문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연예신문 「보드라인 뉴스」의 편집장이 그를 이 신문의 서부 통신원으로 스카우트했다.이때가 1927년,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이때부터 60년대 초반까지 「뉴욕 데일리 미러」를 비롯한 미국 신문과 방송에는 재기발랄한 새 형식의 「가십」기사와 멘트가 넘쳐났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이 전례없이 3선을 노린다는 사실을 특종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언론계의 거물로 성장해갔다.
그는 그러나 50년대부터 달라졌다. 의미심장한 페이소스와 경쾌한 리듬이 살아있는 그의 보도는 미국인들을 여전히 사로잡았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시각 때문에 반대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조지프 매카시상원의원을 만나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변신했고 50, 6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선풍을 이끌었다. 때때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그가 7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외롭게 숨졌을 때 장례식에는 1백여명의 조문객 밖에 참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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