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카드 소진에 탈고립 불가피/정권교체 맞물려 진로 더불안 핵문제는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온 가장 큰 요인이었다. 거꾸로 보면 핵문제는 북한을 밀려오는 개방의 거센 파도로부터 지금껏 막아온 방패이기도 했다.
20개월 가까이 강경한 협상을 벌여온 결과 북한은 당장은 원하던 생존권과 경제적 지원을 획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북한은 고립을 탈피하게 되면서 더욱 불안하고 유동적인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역설적인 사실이다.
이번 제네바 합의문과 부속합의서에서는 새로운 주변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북한측이 추진할 노선의 대강이 읽혀지고 있다. 북한은 소련권이 붕괴한후 자본주의 실험에 실패한 사회주의정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충분한 적응기간을 확보하려고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양극체제가 무너진 뒤 전세계에서 역학구조가 재편 됐지만 북한의 주변만큼은 핵문제로 시간이 동결된 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을 묶어놓기 위해 북한이 내놓을 수 있는 정책수단은 핵카드외에 없었다. 미국과의 합의에 도달한 이후에도 북한은 특별사찰 수용등을 수년 뒤로 미룸으로써 더 시간을 벌려 하고 있다.
결국 정권과 체제를 서서히, 그리고 안전하게 변화(개방)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 앞으로도 북한 지도부의 최대목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패」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지금 북한을 바라보는 남측의 시각은 불안하다. 북한은 60년대 쿠바 미사일사태로 소련의 한계를 목격하고 중소간 이념분쟁을 겪으면서 자주노선을 수립, 실천해온 경험이 있다. 같은 기간 북한은 대내적으로 1인독재체제를 강화하며 「강철의 대오」를 짰었다.
김정일체제하의 북한이 핵문제이후의 유동적인 환경속에서도 과거와 같은 강철대오를 유지해 나갈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권교체기를 동시에 맞고 있는 북한은 개방과 변화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며 자주노선을 걸어가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16일 화환증정식에서 다리를 저는 장면을 위성방송 앞에 드러내야 했던 북한 혁명1세대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북한의 운명을 그대로 상징할 수도 있다. 핵문제타결 후 국제관계속에 서서히 복귀하면서 북한은 오진우처럼 자신의 병들고 취약한 실체를 주변강국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될 것같다.
우리입장에서 앞으로 핵투명성자체보다 북한이라는 땅이 장기적으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는 것을 더욱 우려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늘고 있다. 교차승인이 한반도안정을 위해 의미를 가졌던 것은 미일과 중소가 대체적으로 양진영으로 갈리어 있던 냉전시대의 일일 뿐이다.
북한을 왜소한 시장규모, 취약한 사회간접자본으로만 판단, 「매력없는땅」으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당국의 너무나도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지정학적으로 북한은 절대로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땅이다. 그런의미에서 북한에서의 현상유지(STATUS QUO)를 바란다는 각국의 입장은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있는 가면일 수 밖에 없다. 김정일후계체제의 붕괴 또는 표류는 이같은 가면을 벗어던지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지난해 5월 북한이 특사교환을 처음 제의한 통지문에서 『서로 동족의 손을 잡아야지 남의 손을 잡으면 결국 우리 겨레가 남의 칼에 놀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스스로 불안한 정세인식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김정일이후」를 생각한다면 당국대 당국간 대화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하루빨리 북한에서의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수십억달러의 경수로는 지원하면서 민간경제차원의 북한진출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정리한 정부정책은 이 때문에 모순일 수밖에 없다.【유승우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