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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단편 「노을」/윤지관 덕성여대교수·문학평론가(소설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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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단편 「노을」/윤지관 덕성여대교수·문학평론가(소설평)

입력
199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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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늙음에 대한 명상 구효서의 단편 「노을」(「황해문화」 94년 가을호)을 읽으면서 새삼 시간의 정체를 생각한다.

 시간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틀이되 늘 우리 앞에, 곁에, 안에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무심히 쓰고 때로는 학대하며, 그리곤 잊어버린다. 그러나 불현듯 시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온다.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일 때도 있지만 그 모습은 엄격하다. 가차없는 시간의 발소리가 우리 일상에 울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마치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전율한다.

 때로는 고통이나 뜻밖의 죽음이 시간의 엄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이 불러오는 늙음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늘상 우리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우리를 야금야금 삼킨다. 「노을」은 이 늙음에 대한 명상이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웬만큼 성공한 젊은 소설가인 화자는 어느 「눈부시게」 맑은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옛 스승을 만난다. 백발의 스승은 예전의 기품은 간곳없고 초라한 몰골의 늙은이가 되어 있다. 그는 초췌하고 불안하고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둘은 어색하게나마 동행하며 과거 이야기를 나누지만 기약없이 헤어진다. 일년 후 화자는 다시 스승과 조우하게 되나 스승은, 화자의 생각이지만, 「완강하게」 그의 눈길을 피하고 사람들 사이로 피해버린다. 거기에는 어느새 노을이 짙게 물들어 있다.

 한 편의 단편에서 거창한 의미를 끌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젊은 제자를 외면하고 노을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은 늙음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뜨거운 한낮이 기울어 노을이 지듯,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어간다. 화자의 스승처럼 초라하게 늙음을 맞지 않으리라는 저마다의 소박한 희망도 시간의 칼날 앞에 무너지는 때가 온다. 그럴 때, 젊은 제자를 황망하게 피해가는 그 「완강함」은 삶의 황혼녘에서 시간의 힘을 받아들이게 된 나이듦의 「기품」일 수도 있다. 스승의 만년에 대한 이 만가가 삶에 대한 명상을 담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이 작품은 단순한 구도만큼이나 내용상 소품에 그친 면이 많다. 젊은 화자의 삶도 반성적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면(지루한 생활의 연속이라는 정도는 나타나지만), 더 밀도있는 작품이 되고, 속물적인 양태로 허비되는 시간의 오용들이 더 파헤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는 시간의 의미를 너무 사적인 차원에서만 고려한다. 노을에 역사성을 싣는 것, 이것이 작가에게 남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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