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임 재무장관은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한국은행 독립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전임 홍재형장관은 헌법상 정부의 고유기능인 통화관리기능을 한은으로 이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임 박재윤장관도 한은이 통화신용정책을 독자적으로 수립·집행하면 정부의 다른 정책과의 부조화가 생길 수 있다면서 한은독립에 반대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한편으로는 국민적 합의를 저버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7년 가을, 한은은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통해 각당으로부터 한은독립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 약속은 90년 1월의 3당(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통합 이전에는 물론이려니와 노태우정부 말기에도 김건총재의 임기보장과 아울러 유능하고 비전을 가진 후임총재를 물색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른바 문민정부는 출범후 한 달도 못 되어 임기를 3년 남겨둔 한은총재를 전격 경질함으로써 한은독립의 요구를 사실상 무산시켰다. 이번 신·구임 재무장관의 계산된 발언은 김영삼정부가 한은독립에 반대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굳게 약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것이면 고쳐야 한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은 시대적인 요청이다. 따라서 한은독립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할지라도 독립 자체는 양보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한국경제의 최대과제는 자생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인데 자생적 성장을 위해서는 정부의 틀이 자유경쟁질서로 대체되어야 한다. 또한 자유경쟁질서는 금융정상화를 통해 이룩되어야 한다. 그리고 금융정상화는 일관된 중앙은행의 정책방향과 역할 속에서나 자리잡을 수 있다.
금융정상화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눈을 밖으로 돌려 보자. 옛 소련과 동구가 붕괴되면서 세계경제 전체적으로 시장메커니즘이 전면에 부상되었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국, 베트남등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경제에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이 나라들은 모두 금융개혁에 매우 적극적이다. 또한 이 나라들의 금융정상화 논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금융정상화의 일차적 책임을 중앙은행에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시장경제를 정착시킨 서유럽에서도 하나의 유럽을 표방하며 화폐동맹결성을 위한 논의가 한창인데 이들 역시 통합후 통화가치 안정을 실현할 강력한 중앙은행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이미 불란서와 영국이 지금보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만드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중앙은행은 2차대전후 신생국에서 법에 의해 설립된 것을 예외로 한다면 시장기구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그리고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윤활유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은행을 통한 정책은 일반적인 정부정책과는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은 「시장밖에서」시장메커니즘에 입각하여 수립·집행된다. 물론 중앙은행이 공공의 목적을 갖는 이상 정부와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의 특징은 시장내의 기관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시장기구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의 정부로부터의 독립(INDEPENDENCE OF GOVERNMENT)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부내에서의 독립(INDEPENDENCE WITHIN GOVERNMENT)을 확보하였다. 독일이나 미국같이 법적으로 독립성이 보장된 국가나 일본이나 영국과 같이 법적인 독립성이 약한 국가를 막론하고 운영면에서의 자율성은 중시되고 있다.
재무부는 지난날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금융정상화에 대해 보다 굳은 의지를 갖고 한은독립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대통령의 결심에 달려 있다.
한국은행도 너무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분데스방크의 전총재 슐레징거씨도 말했듯이 중앙은행의 독립이란 통화신용정책의 자율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나라 중앙은행제도 가운데 입맛에 맞는 것만을 모두 골라 가질 수는 없다. 동시에 한은 스스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국회에 제출했던 답변서를 회수하는 태도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한국은행의 독립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기를 바란다.<서울대교수·경제학>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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