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에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가 조선 후기에 나온 한시집 한질이 눈에 띄었다. 값을 깎자 주인은 화가 난 듯 말했다. 『댁에서 안 사셔도 농방에서 잘 가져갑니다』
『농방이라니요?』
의아해 묻는 나에게 주인은 농방이나 음식점에서 도배용으로 잘 사간다고 했다. 주인의 흡뜬 눈초리에 내심 불쾌감을 느끼며 돌아섰다.
얼마전에 강남에 있는 어느 고풍스런 음식점에 들렀다가 방안의 벽들이 온통 고서에서 뜯어낸 종이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부녀자가 지킬 행실에 관해 쓴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본이었다. 귀한 고서로 도배를 하다니, 주인을 부르자며 벌떡 일어서는 나를 친구들이 말렸다.
『복사한 것일거야. 복사한 것이래두…』
진본임에 틀림없었지만, 친구들이 저녁이나 맛있게 먹자고 조르는 통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인사동에서 본 그책은 그동안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저녁 나는 인사동에 가서 그때 그 집을 찾기로 했다. 가랑비에 흐려지는 안경을 연신 닦아가며 아무리 찾아도 그 책방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 가게에 물어보니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지 오래라고 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인사동에 고서점이 열 곳이나 있었는데 이처럼 하나둘 문을 닫고 이젠 두세군데밖에 남아있지 않다.
도쿄의 간다(신전)에는 1천여개에 이르는 고서점들이 타운을 이루고 있다. 고서점들도 전문화가 되어서 문학, 역사, 법학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전쟁서점, 문고판 서점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고서점협회에 구하려는 책을 부탁하면 수소문해서 연락까지 해준다. 베이징, 런던, 심지어 모스크바까지 국가가 자랑하는 고서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십여년 전만해도 엿장수들의 리어카 속에서 진귀한 고서들이 이따금씩 구해졌었다. 이들마저 산업화시대에 밀려난 지금, 폐기되는 고서들을 누가 구해낼 것인가. 1천여개의 고서점이 즐비한 도쿄와 고서점이 자취를 감춘 우리의 슬픈 현실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이상면 서울대교수·공법학>이상면 서울대교수·공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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