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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밝게 빚어낸 투명한 시어/이성선의 시집「벌레 시인」(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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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밝게 빚어낸 투명한 시어/이성선의 시집「벌레 시인」(시평) 

입력
1994.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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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성선은 시집「벌레 시인」(94.10·고려원간)의 자서에서 「내 안의 현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시인의 내면에 현자가 있다는 확신 없이 진술할 수 없는 말이다. 「어질고 총명하며 성인의 다음가는 사람」이 현자에 대한 사전적 풀이다. 이성선의 시는 맑고 밝으며 투명하다. 명징한 언어로 자연 속에 몰입되는 스스로의 정서를 정갈하게 풀어놓는 특성을 갖고 있다. 시인이 자연이란 대상에 흠뻑 빠져 삶의 현장인 현실로부터 초연하려고 한다. 처음부터 현실의 잡사에 관여할 의사가 없음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내설악에서 밤에  우주 전체가  계곡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오세암」),  <산이 나에게 걸어올 때  산길은 내 안에 있다> (「산길」),  <산을 들여다보며  사람이 악기가 되기를 기다린다> (「물을 들여다보며」).

 이러한 구절은 시적 대상인 자연과 합일된 상태나 합일되려는 의지를 나타내려는 예가 된다.

 <사람을 피해  더러움에 고개 돌려> (「들국화」),  <저렇게 썩어 죽어 가는 몸둥이도  흰구름 품은 거울로 누우면  몸에 퍼진 암세포가 목화꽃 음악처럼> (「영안실을 나오다가」).

 이같은 표현은 현실의 잡사에 눈을 돌리려 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게 해 준다. 암세포조차 목화꽃 음악처럼 인식하려는 시인의 생각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는 정도를 넘어 현실에 오불관언하려는 구체적 언표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연과의 교감, 자연에로의 몰입은 현실을 등지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정신주의란 시에서 현실을 들어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의 세계를 채워놓는 일련의 시적 경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선의 시는 정신주의 시의 범주에 놓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등진다」는 것과 현실을 「들어낸다」는 것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등진다」는 것이 현실과의 절연을 의미한다면, 「들어낸다」는 것은 현실과 관계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이성선의 시들은 현실을 등지는 쪽에 서 있다. 현실과의 관계 존속이 아닌 현실과 절연하려는 자리에 서 있다. 현실과 완전히 절연할 때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과의 합일이 지혜의 편린과 만나기는 힘들다. 자연도 현실의 한 부분이란 생각이 거기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 저 미물의 세계에도 생존경쟁이 있음을 그것은 지나쳐 버렸기 때문이다.

 이성선의 시를 한 특색있는 정신주의적 경향으로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인 내면에 있는 현자가 「총명하며 성자 다음 가는 사람」의 자리로 세계속에 서기 위해서는 지혜의 체득이 필요하다. 지혜는 현실과 절연하는 것이 아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획득되는 삶의 알맹이다. 이성선의 시집 「벌레 시인」의 시들은 현자가 현실을 등질 때 세계 속에서 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또 한번 확인하게 해준다.<김선학 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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