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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한/민병용 본사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남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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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의 한/민병용 본사통일문제연구소 연구위원(남과 북)

입력
1994.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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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가장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피해자는 이산가족이다. 그들은 헤어짐과 만남을 위한 내일이 없다. 비극적인 사연 또한 천태만별에다 한에 서린지도 오래다. 이산의 세월이 반세기로 접어들면서 북녘소식을 모른채 영원히 헤어지는 숫자도 늘어가고 있다. 「피란민·실향자·월남가족·38따라지」등으로 불리면서도 뚝심과 오뚝이정신으로 살아 온 그들이지만 핵문제 때문에 또 한번 상심을 하고 있다. 올 국정감사때 통일원은 남북한에 약4백20만명의 이산가족이 있을 것이라고 국회에 자료제출을 했다. 이 숫자는 본인과 직계가족만 계산한 것으로 친인척은 포함되지 않았다. 내무부는 1976년 이북5도민회를 통해서 확인한 남한의 이산가족수를 5백만명으로 보았고 북한에도 같은 숫자가 있을 것으로 추계를 했다. 그래서 통칭 「1천만이산가족」이라는 비극적인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오늘의 숫자를 보면 그 당시와 큰 차이가 나듯 30이 넘어서 잠시 피란을 나왔던 이들은 이미 많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산가족은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1992년 발효된 남북한기본합의서 18조에는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자유로운 서신거래와 왕래, 상봉및 방문을 실시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다행스러운 것은 이산가족들이 제3국(중국·미국·일본)을 통해서 북쪽가족의 생사확인에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통일원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 반갑다. 한때 북한의 가족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간 이산가족도 적지 않았다. 그중 약5천명의 재미교포가 북한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왔다.

 통일원은 1989년부터 올9월까지 약1천9백명의 이산가족에게 북한주민접촉승인을 해주었다. 그중 약6백30가구가 북한가족을 찾아냈고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60명은 제3국에서 북한의 혈육과 직접 만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이 숫자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인모노인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송을 허락했는데, 요즈음에는 또다른 미전향장기수인 김인서·함세환노인의 편지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서 오가고 있다. 이북5도민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산가족문제를 우선시하고 있는데 북한은 너무 정치적으로 해결을 하려 한다』면서 『하루빨리 남북한이 판문점에 가건물이라도 지어서 이산가족 생사확인에 나서야 할것』이라고 호소를 한다.

 북한은 1981년부터 1991년까지 구소련·중국·미국에 사는 이산가족의 방북을 허락했다. 그후 10년의 이산가족사업을 평가하면서 『조국을 다녀간 그들이 우리체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그 문호를 다시 좁혀 놓았다. 요즈음에는 친북성향이 있는 이산가족만 선별로 입국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40년이상을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고문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새 정권은 이산가족문제에 획기적인 결단을 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핵개발보다 더 시급한 일이 이산가족의 만남이다. 북한이 달라지는 첫 조치로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및 상봉에 적극 나섰으면 하는 것이다. 이산가족은 훗날 민족화해와 통일에 교량역할을 할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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