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라파는 너무나 달라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별천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 국민의 눈에 비칠 한국의 일그러진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북구라파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현미경아래 놓인 미생물처럼 한국사회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에 치러진 총선 덕분에 스웨덴의 국회는 41%가 여성 정치인으로 채워질 전망이다.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세 국가 역시 정치적 남녀평등의 차원에서 최첨단을 달리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처져 있다는 덴마크에서 조차 여성은 전체 국회의원 수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처지는 전혀 다르다. 상당수의 한국 남성은 성희롱이라는 폭력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만큼 여성의 감정에 둔감하고 사회는 노동시장에서의 갖가지 성차별을 당연시 할 만큼 여성의 권리에 무지하다. 심지어 적지 않은 태아가 남녀차별의 문화에 희생당하여 이 땅에 태어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평등을 최상의 가치로 삼아온 우리의 「운동가」조차 대다수는 남녀차별을 쟁점화해 본 적이 없다. 근대화와 국제화의 기치아래 서양을 닮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발전론자 역시 남녀문제에 가서는 침묵하고 만다.
성차별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하면 한국사회는 즉각 「문화론」으로 자신을 무장하여 변명하기에 바쁘다. 역사발전의 다른 길을 걸어온 구라파의 잣대로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반론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인권은 근대라는 역사적 단계를 한국보다 일찍 시작한 서양에서 먼저 등장한 것이지 서양문화 자체의 독점물은 아니다.
게다가 근대적 여권의 개념과 전통적 문화가 서로 상극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여권을 존중하는 측면이 부족하지만 근대적 인권의 관념과 어울려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본주의의 측면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이 무너지면 한국사회의 최대 약자인 여성이 일차로 컴컴한 지하에서 탈출한 「악마」의 타깃이 되어버리고 만다.
지난 한달의 잇따른 강력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지존파는 젊은 여성을 살인 실습을 위한 「재료」로 삼았고 택시기사 온보현은 세계 제1의 기록을 세운다면서 힘없는 부녀자만을 골라 천인공노할 성폭행과 살인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30대의 어엿한 직장인 4명이 야타족으로 자처하며 10대의 소녀를 잇따라 윤간하는 사건마저 터졌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남녀차별의 문화에 젖어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통문화 전체가 건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별이라는 전통의 음지가 더욱 넓어져 갈때 인본주의라는 양지는 더욱 파괴되었다. 동서양 문화의 장점을 서로 조화시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보다 근대적 인권의 개념을 말로만 배우고 전통문화의 단점만을 키운 것이다.
한국의 여성은 불안하고 고달프다. 차별과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해 줄 세력의 등장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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