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도 늦추고 느긋하게 살자” ○…「생활의 속도를 늦추고 느긋하게 살자」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서 매우 더디게 그러나 착실하게 회원수를 늘려가고 있는 이른바 「슬로비족」의 구호다. 「슬로비」(SLOBBIE)란 말은 「천천히 그러나 보다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들」(SlOWER BUT BETTER WORKING PEOPLE)을 뜻하는 영문표현에서 유래됐다.
슬로비족들은 1990년 오스트리아 북부의 유고접경 지역인 클라겐푸르트에서 첫 모임을 갖고 「시간 늦추기회」란 이상한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워낙 느긋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라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현재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스위스등 4개국에 약4백명의 회원이 있는 이 모임의 회장은 오스트리아의 조직행동 전문가인 페터 하인텔박사(53).
○…그는 『현대 사회에선 시간의 간격이 점점 짧아짐에 따라 모두가 서두르기만 할 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차분히 생각하는 사람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들고 사람들은 그 일을 풀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이 이런 악순환과 시간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는 현대의 시간을 늦추는 길밖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에서 시간강사로 「고대 그리스예술사」를 강의하고 있는 마틴 미카엘 로스박사(32)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전형적인 슬로비족이다. 자신을 「매우 느린 사람」으로 소개하는 그는 자전거를 애용한다. 자동차는 아예 면허증조차 없고 장거리 여행은 대개 기차를 이용한다. 비행기는 딱 한번 타봤을 뿐이다. 여름휴가는 항상 한적한 시골에서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보낸다. 손으로 빨래하기를 좋아하고 슬로비족 동료들과 맥주집에서 한가하게 담소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슬로비족들을 마냥 게으른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로스박사는 남들이 통상 4∼5년 걸려 따는 박사학위를 3년만에 취득했다. 대학시간강사이면서 동시에 광고회사의 유능한 카피라이터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고전을 탐독하지만 현대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한가한 거리를 자전거로 천천히 달려 출근하고 밤 늦게까지 책을 읽거나 글쓰기를 좋아한다.
80년대 「도시의 젊은 전문직업인」을 상징했던 여피족(YUPPIES:YOUNG URBAN PROFESSIONALS)만큼 존재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거리 곳곳에선 슬로비족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에 공감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된다. 점심시간 회사근처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샐러리맨들도 어쩌면 등록되지 않은 슬로비족일는지 모른다. 밝은 태양과 푸른 수목 사이에서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이용해 이들은 「천천히 그러나 보다 훌륭하게」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을 것이다.【빈=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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