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연구개발로 “고급화”가 성공비결 면도기 제조로 유명한 질렛사(GILLETTE)의 보스턴 연구소에서는 매일 아침 기이한 행사가 벌어진다. 면도를 하지 않은 채 출근한 2백명정도의 사원들이 세면대 앞에 늘어서서 연구진의 지시에 따라 면도를 한 다음에 보고서를 써낸다. 자사 제품과 경쟁사 제품의 성능과 감촉을 비교평가하기 위한 실험인 것이다. 이 실험에 참여하는 사원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지만, 상당수의 여자사원들도 섞여있다. 중학교에만 들어가도 다리의 털을 깎기 시작하는 미국여자들은 면도기 소비의 29%를 점하고 있으며, 질렛사는 결코 이같은 여자소비자의 비중을 간과하지 않는다.
특히 새 면도기의 성능실험에는 면도기에 광케이블로 연결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면도날이 수염을 자를 때의 각도나 피부와 면도날의 접촉모양을 촬영하기도 한다.
질렛사의 면도기 성능 비교실험은 연구소가 아닌 중역들의 세면실에서도 이루어진다. 앨 제이언회장은 일주일에 몇번씩은 한쪽 얼굴은 자사 제품 면도기로, 다른 한쪽 얼굴은 경쟁사 제품으로 면도를 한다. 질렛사의 홍보담당자인 매트 밀러씨는 『회장과 사원뿐만 아니라 회사중역들도 아침마다 이런 실험에 참여한다』고 설명한다. 보스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프루덴셜 타워의 질렛본사에서 만나본 질레트 사원들은 이렇게 면도를 해서인지 얼굴들이 깨끗이 다듬어진 것을 대번에 알수 있다.
질렛사의 이런 실험은 미국의 기업경쟁에서 연구개발(R &D)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일면이다. 이 회사의 연구개발 담당 부사장 존 부시박사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염을 깎을 때와 깎고 난후 느낌을 평가하는데 인간스스로의 경험보다 더 나은 과학적 방법은 없다』며 이 실험이 좋은 제품생산에 기여하는 질렛의 전통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질렛사는 면도기는 물론 브라운(BRAUN) 전기제품, 「오랄B」칫솔, 「파커」「페이퍼 메이트」등 필기도구까지 다양한 소비제품을 전세계에 걸쳐 생산하는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이다. IBM이나 제너럴 모터스(GM)같은 미국의 거대한 제조업체들이 비틀거리던 시기에도 질렛은 새 제품을 히트시키며 미국제조업이 죽지 않았음을 실증한 회사로 월가의 신뢰를 독차지해 왔다. 질렛의 작년 국내외 총매출액은 54억달러로 92년보다 5%나 성장하면서 8억달러의 영업순익을 올렸다. 지난 80년 불과 4달러정도였던 질렛의 주가는 요즘 뉴욕증권시장에서 70달러를 넘어서고 있으며, 투자관련 주간지 「머니」(MONEY)는 지난 3월호에 『14년간 한번도 투자자를 손해보게 하지 않는 우량성장주식의 제1번』으로 질렛사 주식을 꼽았다.
질렛의 기업성공의 비결은 「누구나 만들수 있는 면도기를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고급기술 제품」으로 바꾸어 놓은 R&D전략에서 찾을수 있다. 질렛은 면도기에서만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경쟁사에 양보할수 없다는 기업철학을 갖고 있다. 간판 상품인 면도기 개발에 보이는 질렛의 집착력은 연구개발(R &D)시스템과 그 운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질렛 산하의 모든 제조업체는 마케팅과 바로 연결되는 5년내 단기의 R &D를 담당하는 연구소를 개별적으로 갖고 있으며, 새로운 제품개발등 5년이상의 장기적인 R &D를 총괄하기 위해 그룹차원의 연구소가 보스턴, 워싱턴DC, 런던등 3곳에 있다.
질렛이 R &D에 투입하는 연간 예산은 총매출액의 2.4%인 1억3천5백만달러로 미국기업의 평균정도이다. 그러나 면도기라는 주력제품개발을 향해 회사성격에 적합한 독특한 R &D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평균남자의 얼굴에 나는 수염은 몇개나 되며 얼마나 빨리 자라는가. 미국 성인남자의 얼굴에는 평균 3만개의 수염이 있고 1년에 13.75cm씩 자란다. 질렛사가 20년전에 이미 연구한 결론이다. 마른 상태의 수염 하나가 같은 굵기의 구리줄보다 강하다는 사실도 질렛의 연구결과이다. 질렛이 사람의 얼굴에 대한 연구에 이렇게 몰두하는 이유를 부시부사장은 『면도기는 객관적인 상품이라기보다 주관적인 상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보스턴=김수종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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