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너온 북한주민·한국관광객 뒤섞여/하루300여명 왕래 북·중최대관문… 물물교환식 거래 도문은 북한사람과 중국조선족의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지는 중·조변경 도시이다. 연길부근에서 부르하통하(포이합통하)와 합친 해란강은 동쪽으로 50쯤 흘러내려 어머니 두만강을 만나는 합수머리에 도문이라는 도시가 형성되게 했다. 도문이라는 이름 자체가 만주어로 여러 갈래의 물이 합쳐진다는 뜻이다.
강물이 만나고 헤어지듯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곳 도문해관은 북한과 연변을 잇는 두만강 최대의 관문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철교를 통해 하루 두 차례씩 화물열차가 강건너 북한 남양시를 오가고 도문대교로 양쪽을 넘나드는 북한주민이 평상시 하루 3백명은 된다. 두만강변에서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여기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지난 8월 김일성 사망후에 북한사회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기자들이 이곳에 대거 모여들었다.
도시 남동쪽 강안에 있는 도문해관에 들어서면 여지없이 개방중국의 상혼을 먼저 만나게 된다. 해관 오른편 입구에서 북한의 지폐와 엽서를 관광기념품으로 파는 조선족 아줌마들과 건너편 북한땅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권유하는 사진사들이 여간 집요하지 않다. 호객대상은 물론 한국관광객들이다. 백두산 관광길에 두만강건너 북녘땅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의 무대는 십중팔구 이곳 해관이다. 사진 한쪽에 망강루라는 조악한 중국식 정자나 「중조변경」이라는 팻말이 보인다면 틀림없다. 갈 수 없는 고향땅을 사진으로나마 붙들어 두려는 북한출신 실향민들은 여기서 망연한 표정으로 강너머를 바라보거나 눈물을 쏟고서야 발길을 돌린다.
초라한 3층 콘크리트 해관건물의 경비를 맡고 있는 중국변방 수비대원들의 표정은 중국조선족 장사꾼들의 활력과는 대조적으로 굳어 있다. 특히 김일성 사망 후 이곳을 통해 전해지는 북한정보의 난무와 그에 따른 미묘한 중국측 입장 때문에 경계의 눈초리가 한층 긴장돼 있다.
해관건물안에서 만난 10여명은 억센 함경도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눈에 띄게 초라한 입성이나 행색만으로도 단번에 북한주민임을 알 수 있다. 친척방문등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들은 짐을 일일이 뒤지는 까다로운 출국검사로 곤욕을 치른다. 자전거 재봉틀 라디오는 각 1대, 담배 2백이하, 쌀 1가마, 술 2병…. 벽에 나붙은 물품통관 허가기준의 차가운 잣대가 친척들이 챙겨준 물건꾸러미를 마구 헤집는다. 세관원들에 매달리는 이들의 통사정에서 어쩔 수 없이 찌든 궁핍이 전해져 온다.
도문해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무역은 81년께부터 본격화했다. 북한측에 변변한 결제수단이 없는 탓에 대개는 물물교환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중국의 의류등 생활용품을 북한의 명태등 해산물, 약초, 원목따위 임산물과 맞바꾸는 방식이다.
해관을 나서면 도문강 하구안이라고 새겨진 대리석 관문이 우뚝 솟아 있고 1백여 남짓한 도문대교가 북한쪽 국경세관으로 연결돼 있다. 다리의 상판과 난간에 10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이 중국쪽 주황색, 북한쪽이 하늘색으로 경계표시를 대신하고 있다. 함북 번호판을 단 트럭이 통관된 짐들을 가득 싣고 떠나고 북한주민과 조선족보따리 장사를 실은 소형버스가 강을 건너간다. 사망후에도 북한측 세관건물 정면에는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가 여전하다.
북한측에서 보면 도문은 외부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다. 북한주민들은 그나마 왕래가 있는 도문을 통해 이웃 중국을 바라 보고 그 너머의 세계에 있는 한국을 곁눈질하고 있다. 도문은 그래서 북한에 변화와 개방의 바람을 몰아가는 통풍구가 되고 있다.
<특별취재반>특별취재반>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오늘도 눈물에 젖은 강/중조선족 찾아온 북혈육에 선물싸보내며 “눈시울”
도문을 끼고 흐르는 두만강은 여전히 눈물젖은 강이다. 한 세기전 혈육을 건너 보내던 단장의 이별장면이 오늘도 이어진다.
도문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관문(교두)위에서 만난 흑룡강성의 조선족 김모씨(58·여)도 모처럼 친척방문을 왔던 조카(34)를 배웅하러 나왔다. 함북 북청출신인 김씨(58)와 경남 산청이 고향이라는 남편 안씨(62)는 전형적인 남남북녀. 12세때 가족을 따라 중국에 온 남편 안씨는 지리산자락의 고향마을 시냇가에서 고기잡던 평화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지만 회색 양복차림이 어색한 조카는 돌연한 남한사람과의 대면을 부담스러워 했다.
김씨의 친정부모는 함께 봉오동전투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는 혁명가라는 이유로 77년 북한당국에 의해 온 가족이 평양으로 「모셔」지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70년대후반까지 중국보다 형편이 나았던 북한행은 당시 중국조선족에게는 대단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안쓰러운 눈길로 볼 만큼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조카와 친정어머니(82)의 생활고를 잘 아는 김씨는 주변 친척들을 모아 돈을 추렴, 한 살림이 될 엄청난 양의 「선물」을 마련했다. TV, 라디오, 미싱, 자전거등 북한에서는 귀중품이라고 할만한 가재도구에다가 쌀, 옥수수등 식량까지 꾸렸다. 남동생의 아들로 17세때 평양에 간 조카의 혼란과 갈등은 심해 보였다.
짐 실은 트럭을 먼저 떠나보낸 뒤 조카는 선물받은 자전거를 끌고 다리를 건넜다. 남은 사람들은 조카를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적셨고 다리 중간쯤에서 자꾸만 뒤돌아보던 조카도 끝내 고개를 떨구고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조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중국땅의 가족들은 오랫동안 눈물을 수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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